첫사랑을 만난다면 (4_소설)
유현이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21살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8월이었다.
학과 대표였던 나는 2학기 엠티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금요일마다 가까운 관광지에 답사를 다녔다. 보통 총무인 동기 혜지와 함께 가지만, 그날은 혜지가 아파서 혼자 벽화마을에 답사를 갔다.
벽화마을은 지하철을 20분 탄 뒤, 버스로 환승해서 30분을 더 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벽화마을을 가는 사람만 이용하는 곳이라 평일엔 아주 한적했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친 나는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서 머리를 묶으려다 멈칫했다. 답사를 다녀온 후 남자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는 나의 갈색 단발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더운 날이라 머리를 묶은 뒤 풀면 자국이 남을 것 같아서 손으로 머리칼을 움직이며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마에 한 줄기 땀이 흐르는 걸 느낀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51번 버스가 벽화마을 가는 거 맞나요?” 고개를 들어 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였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의 그는 눈이 무척 크고 맑았고,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무표정도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네, 맞아요.” 더워서 귀찮았지만 예의 있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벽화마을 가보셨어요?”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혹시 대학교 엠티 답사 가시는 거예요?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요.” 이 더운 날 뭐가 그리 궁금하고 즐거운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네, 맞아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니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와! 저도 답사 가요! 어쩐지 관광하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동지를 만나니 반가운걸요? 저는 한국대 약학과 06학번이에요. 실례가 안된다면 무슨 학교인 지 물어봐도 될까요?”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불쾌감이 반가움으로 바뀌는 걸 보면 학연, 지연을 무시 못한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저도요! 저는 한국대 철학과 07학번이에요.”
“21살이세요? 전 22살이에요. 오늘 날이 참 덥네요. 답사 날을 잘못 잡은 듯해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51번 버스 배차 간격이 30분이네요. 오는 길에 보니 작은 카페가 있던데 거기서 잠시 음료수라도 마실까요?” 심심하고 더웠던 지라 그의 말에 응했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제 이름은 유현이에요. 안유현. 혹시 벽화마을에 있는 괜찮은 숙소 아세요?”
“저는 백여름이에요. 선배가 하나 민박 추천해줘서 가보려 해요.”
“네. 저도 덕분에 헛걸음 덜하겠네요. 이름이 여름씨예요? 봄여름 할 때 여름이요?”
“특이하죠? 이름이 튀어서 남들이 기억을 잘해서 불편해요.”
“특별한 이름이네요. 잘 어울려요. 저도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의 칭찬에 멋쩍게 웃었다. 엠티 장소를 서로 추천하다 보니 버스 시간이 되어 다시 정류장으로 나왔다.
51번 버스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먼저 버스에 탑승하고 난 뒤 내가 버스에 올라탔다.
‘잔액이 부족하니 충전한 뒤 이용해주세요.’ 아뿔싸, 교통카드 충전을 까먹었다.
“기사님, 성인 1명 더 결제해주세요.” 그가 버스 기사님께 이야기하며 내 팔을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낼게요. 이리 와요.”
“버스비가 없는 줄 몰랐네요. 고마워요. 다음에 만나면 버스비는 돌려드릴게요.”
“마음 쓸 거 없어요.”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 신세를 진 것이 못내 마음 쓰이고 부끄러웠다. 우리는 버스 뒷 자석에 나란히 앉았다.
“여름씨는 과대표 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철학과는 소수과라 대표라고 하기도 민망해요. 한 학년에 15명인데 절반은 군대 가거나 휴학해서 8명밖에 없어요. 유현씨는요?”
“정말 소수과네요. 서로 잘 알겠어요. 저는 전역하고 복학하니 과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과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과대표 하겠다고 지원했어요.”
“네. 서로 모르는 게 없죠. 유현씨는 사람들이랑 시간 보내는 거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약학과라고 하셨죠? 약대 건물은 어디 있어요?”
“약대는 서문 쪽이요. 철학과는 동문 쪽에 있죠? 정반대네요.”
“네, 그래서 서문 쪽으론 가본 적 없어요.”
“그럼 서문 맛집 안 가보셨겠네요? 정말 맛있고 저렴한 곳 많은데! 칼국수 좋아해요? 4천원인데 4만원 줘도 아깝지 않은 맛이에요.” 그는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궁금하네요.”
“네, 다음에 같이 가요. 깜짝 놀랄 거라 장담해요.”
“네, 그래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그와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1년 반 동안 만난 남자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니 벽화마을에 도착했다는 버스 알람음이 나왔다. 대화가 즐거워서 긴 시간이 지겹지 않았다.
언덕 위에 있는 벽화마을은 골목마다 감각적인 벽화가 많아서 눈이 즐거웠다.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지 골목마다 포토존과 다이어리에 찍어 기념할 수 있는 도장이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기념 도장 좀 찍고 올게요.” 내가 가방에서 연보라색 일기장을 꺼내며 말했다.
“일기 써요?”
“네. 거의 매일 써요. 입장권이나 영화 티켓 붙이면서 꾸미는 거 좋아해요. 몇 년 뒤에 보면 재밌더라고요. 제 인생은 제가 기억하고 기록해야죠.”
“와, 멋지네요. 전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일기 쓸 때도 억지로 썼는데. 그 이후엔 일기는 써본 적 없어요.”
“공부하느라 그랬던 거 아니에요? 약대 가려면 공부 엄청 많이 해야 하잖아요.”
“아니에요. 그냥 게을러서 그래요. 아, 여름씨는 철학과 졸업하면 뭐하고 싶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이들이랑 함께하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요. 논술 강사나 윤리 교사 쪽 생각하고 있어요.”
“여름씨가 선생님 하면 학생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저 학교 다닐 때 여름씨 같은 선생님 계셨으면 공부 더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아이, 뭐예요. 그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유현씨는 왜 약학과에 갔어요?” 부끄러워서 말을 돌렸다.
“비밀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알려줄게요.”
“네? 비밀이라니 괜히 더 궁금하네요.”
“글쎄요…. 어, 저기 하나 민박 보여요!”
선배에게 추천받은 민박집은 시설도 깔끔하고 가격도 15만원으로 저렴했다. 나는 바로 예약했지만 그는 바닷가 민박집 한 곳을 더 가본 뒤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의 과 엠티엔 교수님도 오시는 데 교수님께서 오르막을 오르는 것을 힘겨워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많이 가파르진 않았지만 그의 배려심에 작게 감탄했다.
마지막 골목에 들어서자 물고기 벽화와 길거리 사진기가 보였다. 길거리 사진기를 좋아하는 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 여기 길거리 사진기가 있네요?”
“그게 뭐예요? 전 처음 봐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기계로 사진 찍으면 메일로 보낼 수가 있어요. 그냥 핸드폰으로 찍는 것보다 화질은 안 좋지만, 여행할 때 기억이 남아서 좋아요. 무료기도 하고.”
“그럼 같이 한 장 찍을까요?”
“네, 그렇게 해요. 모르는 사람이랑 사진 찍는 것도 처음이네요. 나중에 보면 재밌겠어요.”
“두 시간 봤으면 이제 아는 사람 아니에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조금은 경직된 자세로 서서 사진을 남겼다.
“제 메일로 사진 보냈어요. 집에 가서 사진 확인하고 보내드릴게요. 메일 주소 적어주세요.”
다이어리 맨 뒷장을 펼쳐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
그때 핸드폰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여름아, 오늘 못 볼 것 같은데 어쩌지? 오늘 취업 스터디가 늦게 끝날 것 같아. 시험이 3달밖에 안 남아서 중요한 시기라… 미안해. 스터디 끝나고 밤에 연락할게. 사랑해.’
남자 친구의 연락이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