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2_소설)
“어…? 어떻게 된 거지?”
커피 향이 코끝을 감돌아 눈을 뜨니 아늑한 카페 안 소파에 앉아있다. 아까 차에 치인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병원이 아니라 카페에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로 된 탁자와 짙은 녹색 소파들이 보였다. 카페는 아주 큰 규모였고 좌석 사이에 키가 큰 초록 식물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골조가 목재로 되어있어 싱그럽고 편안했다. 사람들이 꽤 많았으나 이상하게도 내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아주 큰 창문 옆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들어왔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고요한 적막과 따스한 바람에 이곳이 평범한 카페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선 카운터로 가서 이곳이 어디인지, 오늘이 며칠인지부터 물어봐야겠다.
“사장님!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카운터 안쪽에서 70대로 보이는 여인이 나오며 말했다.
“사장님,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혹시 지금 며칠이죠?”
“천천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계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왜인지 모를 그녀의 위압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이상한 점이 하나둘씩 눈에 보였다. 전부 한 명씩 앉아있는 데다 모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묘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긴장됐지만 지금은 방금 만난 여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찬찬히 돌이키고 있는데 여인이 걸어왔다. 그녀는 흰머리가 아닌 은발로 보일 정도로 매력적인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걸음걸이는 우아했다. 발목까지 오는 짙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내 앞에 멈춰 서서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한국대 철학과 강사 백여름님, 맞으신가요?”
“네.” 나를 어떻게 아냐고 물으려는 순간 백발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먼저, 조의를 표합니다. 백여름님은 12월 12일 밤 10시,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 카페는 이승에서 죽은 사람들이 완전한 죽음의 세계, 저승으로 가기 전 머무는 공간입니다.”
“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니 그녀는 익숙한 듯 말을 이었다.
“이곳은 BCD카페 4호점입니다. 혹시 ‘인생은 B와 D 사이 C이다.’ 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장 폴 사르트르 말씀하시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네. 이승에서는 BCD를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해석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C는 Choice가 아니라 Chance입니다. 삶이 끝나고 죽음으로 가는 사이,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1년 동안 당신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내가 죽지 않는단 말인가요?”
“죽음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당신은 죽었지만, 원하는 과거 날짜로 돌아가서 1년간 삶을 마무리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요.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네. 혼란스러운 게 당연합니다. 제가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여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하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내가 죽었다고? 그럴 리 없잖아.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럽긴 했지만 고속도로 한 복판도 아니고 작은 도로였는데. 겨우 이런 일로 죽을 리 없어. 저 카페 주인도 의심스럽고 이 카페도 이상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저기요, 저기요! 뭐 좀 여쭤볼게요!”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가지각색의 자세로 소파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출입구를 향해 달려가자 여인이 내게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그 말을 무시한 채 출입문을 열고 달렸다.
연두 빛 잔디밭을 달려가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잔디밭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비행기를 탄 것처럼 모든 건물과 산이 아주 조그맣게 보였고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비틀거리다 떨어질 것만 같아 안전한 곳까지 기어 왔다. 절벽을 바라보고 앉으니 숨이 턱 막혔다. 그때 여인이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안에 들어와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안정을 취하십시오.” 의심스러웠지만 이곳에 기댈 사람은 그녀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여긴 대체 어디죠? 다른 사람들은 왜 눈을 감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죠?”
“다시 한번 설명드리겠습니다. BCD 카페는 이승과 저승 사이, 잠시 머무는 공간입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고 싶은 시절로 돌아가서 1년간 지내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는 동안 현재의 육체는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눈을 감고 계신 분들은 과거를 체험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저는 고인들에게 이 기회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회사의 직원입니다.”
“… 저는 겨울밤에 사고를 당했어요. 그런데 여긴 왜 따뜻한 낮이죠?”
“이곳은 여러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를 이동하는 공간입니다. 이승과는 다른 세계이지요. 고인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모두 다르기에 이곳은 항상 지금과 같은 모습입니다.”
여인이 하는 비현실적인 말이,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과 일치했다. 그제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눈물이 차올랐다.
“왜 수많은 사람 중에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제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일찍 죽어야 하죠? 내가 대체 뭘… 왜 나한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여름님, 죽음은 생명을 가진 누구나 겪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만 이승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름님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죽은 건 아닙니다. 태어났으니 당연히 죽는 것이지요. 다만 그 죽음이 언제 올 지 예측할 수가 없었을 뿐, 모든 건 정해진 대로 이뤄졌을 뿐입니다.”
“제가 만약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까요? 그 시간에 택시를 잡으러 길가로 나가지 않았다면 살았을까요? 제가 만약….” 눈물로 코가 막혀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모든 행동이 후회되었다. 다르게 행동했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했어도 죽음을 맞이했을 거예요. 운명은 바꿀 수 없습니다.”
“태형씨한테 모질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홍차를 건넸다. 향긋한 향과 적당한 온도의 홍차가 목을 타고 내려오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제야 나는 눈물을 닦고 여인을 응시했다.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좋았고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고객을 대하는 사무직 직원처럼 딱딱하고 정갈한 말투를 사용해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생각을 하는데 여인이 검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책 표지엔 ‘백여름’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