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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Aug 31. 2021

아빠한테 좀 더 살갑게 말할걸

첫사랑을 만난다면 (3_소설)

“책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여름님이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겁니다. 재생 시간은 5분이며 영상이 끝난 후 돌아가고 싶은 시점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표지 위 이름이 새겨진 곳에 손을 얹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크게 심호흡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4살쯤 되었을까. 어린이 대공원에서 솜사탕을 처음 맛보고 해맑게 웃는 내가 보였다. 젊은 시절의 아빠는 솜사탕으로 수염을 만들어 붙이고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자 아빠는 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날 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중학생 이후로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남자 친구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아빠한테 살갑게 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 아빠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되어 보였다. 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비슷한 나이의 그들은 어린 생명을 책임지고 있었다.               





영상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엄마와 낮은 책상에 앉아 숫자와 한글을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같은 질문을 계속했지만 엄마는 싫은 내색 없이 웃으며 다시 알려주었다. 



며칠 전 쌀이 다 떨어져 간다며 내게 인터넷 배송을 부탁한 엄마에게 주문 방법을 몇 번이나 알려줬는데도 못하냐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의 보살핌으로 자란 내가 잘하는 게 많아졌다고 엄마를 무시하고 가르치려 든 것이 후회됐다. 다시 한번 알려주고 주문 방법을 적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 시장에서 무겁게 쌀을 짊어지고 오실 엄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엄마 아빠가 내 장례를 치르며 슬퍼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친한 친구와 다른 중학교를 가게 되어 우는 모습, 중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간식 먹는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 코피를 흘리며 공부하는 모습은 너무 대견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저만큼 열심히 할 자신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3처럼 열심히 했으면 못 이룰 일이 없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다.       




  

 수능을 치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머리를 염색하고 서툰 화장을 하는 모습엔 웃음이 났다. 대학에 입학해서 주량도 모른 채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며 취한 모습도 우스웠다. 그 시절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보니 반가웠다. 서로의 삶이 바빠 잘 보지 못했기에 청첩장 줄 때 만나려나 싶었는데, 자주 만날 걸 싶었다.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가다가 어떤 이의 모습이 나온 순간 너무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그 순간 영상도 끊겼다.          





안유현.

나의 첫사랑.      




    

분명 그 사람이었다.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마음속 한 부분을 차지했던,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서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날 수 없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21살에 만난 그와의 추억은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다만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만 떠오르는 것이 늘 속상했었다. 그토록 생각해내려 애썼던 그리운 얼굴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여름님, 다시 눈을 감으셔야 합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시 눈을 감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소개팅으로 만난 태형씨와 6년간 연애하는 모습이 나왔다. 언제나 그는 갑이었고 나는 을이었다. 나는 그를 많이 사랑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유현이가 있었다. 내게 마음이 식어가는 태형씨를 보면서 유현이라면 어땠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30대의 연애는 20대의 연애처럼 뜨거울 순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연애 외에도 책임져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항상 뜨겁고 싶었다. 늘 서로가 우선순위였으면 좋겠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반짝이는 눈을 매일 보고 싶었다.      




    

태형씨에겐 미안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유현이로 가득해서 영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유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지만,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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