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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22. 2021

이걸 입고 다녔다고? 너무 촌스럽잖아!

첫사랑을 만난다면(20_소설)

핸드폰을 찾으려 침대 위를 살폈다. 보라색 폴더 핸드폰을 열자 오늘 날짜가 보였다.


2008년 8월 28일 오전 10시.


이게 현실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핸드폰을 요리조리 살펴보니 그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동기와 선후배들의 문자가 눈에 띄었다. 가장 위에 ‘아직 읽지 않음’ 표시가 있는 메시지가 보였다.

   

'여름아, 정말 미안한데 내가 오늘 배가 아파서 답사 같이 못 갈 것 같아ㅜㅜ 대신 내가 개강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쏘리!'   


맞아, 혜지가 아파서 혼자 갔다가 유현이를 만났지. 유현이를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게 2시쯤이었으니,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BCD 카페에서 영상을 본 뒤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땐, 얼른 돌아가서 유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과거로 돌아오니 뭐부터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띠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현실 속 엄마 아빠는 많이 슬퍼하고 있겠지. 울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상상 조차 되지 않았다. 엄마의 전화가 반가웠지만 그리웠던 그 목소리를 들으면 덜컥 눈물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여보세요?” 전화벨이 한 참 울린 뒤, 전화를 받았다.

“여름아, 일어났어?” 걱정과 달리, 엄마는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응, 엄마. 잘… 지내지?”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도 통화해놓고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엄마, 보고 싶어.”

“하이고, 네가 그런 말도 하고. 철들었네.”




“엄마, 다리는 안 아파?”

“다리? 멀쩡하지. 지금도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인 걸.”

“응. 너무 무리하진 마. 다리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 꼭 가보고.”





“엄만 너무 건강해서 탈이다 얘. 너나 건강 챙겨. 아, 내 정신 좀 봐. 이거 얘기한다고 전화해놓고선. 엄마가 방금 반찬 보냈거든? 오후에 도착할 거야. 국도 냉동해서 보냈으니 해동해서 먹어.”



“내가 애야 엄마, 혼자서도 잘해.”



“네가 애지 그럼. 해 먹긴 뭘 해 먹어. 안 봐도 뻔하다. 삼각 김밥에 떡볶이 먹고 있겠지.”

“하하, 귀신이네. 알겠어, 고마워 엄마.”



“오늘 좀 이상하네. 사 먹는 게 좋다고 반찬 귀찮으니까 보내지 말라더니, 웬일이래?”

“아냐. 엄마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너 혹시 용돈 떨어진 거 아냐? 오늘 예쁜 말 많이 하니까 용돈 좀 줘야겠네.”

“그건 또 어찌 알고 그래.”



“엄마가 귀신이지 뭐. 너 용돈 떨어져도 달라는 소리도 잘 못하잖아. 용돈 넉넉히 보내주지 못해서 알바 하는 것도 미안하구먼.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할 나이에 엄마가 미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성인인데 용돈 받는 게 더 미안하지. 고마워 엄마.”



“그래. 엄마도 이번 달 빠듯해서 많이는 못 보내줘. 오후에 은행 가서 보내 줄게. 늘 조금밖에 못줘서 미안해, 여름아.” 엄마의 말에 괜스레 또 눈이 붉어졌다.




“아냐, 엄마. 괜찮아. 정말 괜찮아. 충분해.”

“그래,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고 굶지 마. 알겠지?”

“응 엄마. 나 이제 나가봐야겠다. 끊을게.”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평소와 같이 유쾌하고 다정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다리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던 엄마가 오늘은 아프다는 신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 건강한 엄마를 보니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내게 주어진 마지막 1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엄마 다리 안아플 때, 여행도 많이 다녀야지.




1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일단 내가 돌아온 이유, 유현이를 만나러 가야 했다. 2시쯤 버스정류장에서 만났으니 1시에 출발해도 괜찮았지만, 혹시나 길이 엇갈릴까 봐 서둘러 집을 나서기로 했다.   



 





간단하게 배를 채운 뒤, 옷장을 열어보았다. 평소에 무채색 옷을 주로 입었는데, 21살의 내 옷장엔 빨간 치마, 노란 티셔츠, 파란 원피스 등 형형색색의 옷들이 걸려있었다. 이걸 입고 다녔다고? 너무 촌스럽고 튀잖아!


   



당황스러웠지만 옷을 새로 사기엔 돈도 시간도 없었다. 옷장을 둘러보니 유현이를 처음 만난 날 입었던 옷이 보였다. 가슴에 작은 검은색 리본이 달린 깔끔한 남색 원피스. 조금은 촌스러운 그 원피스를 입으니 정말 21살로 돌아간 듯, 심장이 뛰었다. 작은 주황색 가방을 메고 남색 운동화를 신고서 집을 나섰다.



       


지상철을 타러 가는 길, 대학로 가게들엔 내 추억이 담겨있었다. 공강 시간에 사 먹던 기름 없는 호떡, 월급날 먹던 닭똥집, 저렴해서 자주 가던 칼국수집, 테이크 아웃을 하면 1000원 할인해주던 커피집. 졸업하고도 몇 번이나 옛 추억에 대학로를 찾았지만, 변해버린 대학로의 풍경에 실망만 하고 돌아왔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가게들은 그때 그 모습, 그 냄새 그대로였다.     





지상철을 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상철 안의 중학생은 붕어빵 타이쿤에 열심이었고, 내 옆에 앉은 노신사분은 돋보기 안경을 쓰고서 신문을 읽고 계셨다. 그리고 대학생 두 명은 내일 방영할 무한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무선 이어폰을 꼽고서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모습과 다른 풍경에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구나, 느꼈다.







   

20분 뒤, 지상철에서 내리니 저 멀리 유현이와 처음 만났던 버스정류장이 멀리 보였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더운데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조금 겁이 났다. 손으로 뜨거운 햇살을 가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앗” 나도 모르게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버스정류장엔 내가 그토록 그리던 유현이가 앉아있었다. 일찍 나오지 않았으면 유현이와 마주치지 못했겠다고,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말을 걸려고 옆으로 다가갔지만 몇 발자국 걸은 뒤 나는 멈춰 서고 말았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빨리 그를 만나게 되어서, 게다가 내가 알던 밝은 모습의 그가 아니라서 쉽사리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나는 유현이가 앉아있는 의자 뒤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그는 왜 울고 있는 걸까, 궁금한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었구나. 내 앞에서 넌 항상 웃고 있었는데, 어떤 일이 널 이렇게 아프게 한 걸까. 늘 밝고 솔직한 줄 알았던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숨겼다는 사실에 왼쪽 가슴이 아렸다.





그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생각하던 찰나, 51번 버스가 도착했다. 그가 버스에 타는 걸 보고 나도 따라 올라섰다. 그때 경고음이 울렸다.


‘잔액이 부족하니 충전한 뒤 이용해주세요.’    


아차, 잔액이 없는 걸 깜빡했다. 엄마도 아직 입금을 안 한 모양이었다.    




그때, 유현이가 다가와서 말했다.

“기사님, 제가 결제할게요.”        








2부로 돌아왔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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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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