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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25. 2021

괜찮다면, 제가 옆에 앉아도 될까요?

첫사랑을 만난다면(21_소설)

그때, 유현이가 다가와서 말했다.     

“기사님, 제가 결제할게요.” 


“감사합니다.” 그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의 말에 큰 대꾸 없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는 2인석에 앉아있었지만, 텅텅 빈 버스에서 그의 옆에 앉으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한 칸 떨어진 옆 좌석에 앉았다.    


 

버스 오른쪽 좌석에 앉아 왼쪽 창문에 기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예뻤다.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도,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도, 하얀색 이어폰을 귀에 꽂은 모습도. 



그가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를 응시했다. 이마를 살짝 덮은 검은 머리, 맑은 눈동자,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짙은 바지. 손목에 위치한 시계와 노래 박자에 맞춰 무릎을 톡톡 치는 손가락.     




그때, 그가 이어폰을 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습관이세요?” 



    

“네? 무슨…. 아, 돈은 꼭 돌려드릴게요. 저, 그, 아까는 감사했어요. 제가 교통 카드 충전을 안 했나 봐요.” 

예상치 못한 그의 시선에 머리가 굳어 횡설수설했다.     




“아뇨, 눈을 바라보는 거요. 자꾸 보시니 저도 의식이 돼서….”   

  

“아, 죄송해요. 그,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고요. 눈이 빨개서. 아니 아니, 그,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서요. 아는 사람인가 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첫인상부터 망했다. 2008년, 그때와 똑같이 흘러가지는 않는구나.  




   

기분 나빠할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바람이 불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요. 하드렌즈를 끼는데 먼지가 들어가면 눈물이 나거든요.” 





아까 바람이 불었었나? 바람 한 점 없이 햇빛 내리쬐는 날씨였던 것 같은데. 그보다, 그가 하드렌즈를 꼈었나? 그러고 보니 그가 보내준 사진 중에 안경 쓴 사진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구나.



     

“그렇군요. 벽화마을 가시는 거예요?”

“네. 답사 가는 길인데 생각보다 머네요. 엠피쓰리가 없었으면 지겨울 뻔했어요. 그쪽은요?”



“저도 답사 가요. 제 이름은 여름이에요. 백여름.”

“잊기 힘든 특별한 이름이네요. 예뻐요, 이름. 저는 안유현입니다. 반가워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답사 같이 가실래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물었다.



         

“좋아요. 벽화마을 잘 아세요? 전 처음이라.”

“네. 좋은 민박집도 알아요.”     

“좋네요. 그럼 버스비 대신 내 준거 벽화마을 길 알려주는 걸로 퉁 치면 되겠어요.” 드디어 내가 알던 그가 돌아온 것 같았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눈은 반달이 되었다. 



         

“좋아요! 무슨 노래 듣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들어볼래요?” 그가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우리는 창가에서 통로로 몸을 옮겨 이어폰을 한쪽씩 귀에 꽂았다. 내 왼쪽 귀에선 성시경의 ‘거리에서’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 그와 밖에서 들은 게 벌써 3번째다. 그동안 이 노래 때문에 그를 더 잊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나를 생각할지 또 그녀도 나를 찾을지 걷다 보면 누가 말해줄 것 같아
이 거리가 익숙했던 우리 발걸음이 나란했던 그리운 날들 오늘 밤 나를 찾아온다 



    

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이어폰이 귀에서 흘러내렸다.


 

“같이 듣기엔 거리가 먼가 봐요. 괜찮다면, 제가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가 말했다. 

“아뇨, 앉아 계세요. 제가 갈게요.” 내 말에 그는 조금 놀란듯했지만 살짝 일어나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옆에 앉으니 오랜만에 그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숨소리는 곧 성시경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대체되었지만, 나의 심장 뛰는 소리는 오른쪽 귀를 통해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내겐 ‘이번엔 절대 놓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이야기, 과대를 하게 된 이유, 좋아하는 노래 등 이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갈 때, 벽화마을에 도착했다는 버스 안내음이 울렸다.  




   






그와 함께 내리니 벽화마을 입구가 보였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름씨,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전 사진 찍는 게 취민데 괜찮으시면 제가 찍어드릴까요?” 그가 검은색 캐논 카메라를 꺼내며 말했다.


     

“좋아요. 예쁘게 찍어주세요.”     

예전에 그가 내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이번엔,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많이 보여주겠다고, 서로의 등이 아닌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여름씨, 이런 포즈는 어때요?” 그가 슈퍼맨 흉내를 내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내가 쑥스러워하며 따라 하자 소리 내어 웃는 그를 보니 세상에 이런 행복이 있나, 싶었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많이 가까워졌다.

“와, 여름씨, 이거 봐요! 오늘 찍은 사진만 200장이 넘어요. 보통 전 풍경 사진 위주로 찍는데 오늘은 여름씨와 제 사진이 많네요. 인물 사진 찍는 것도 매력 있네요.”  



    

그가 사진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작은 사진기 화면을 함께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었다. 이번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조용한 방에 있으면 평소 들리지 않던 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리듯, 덥고 한적한 벽화마을엔 오직 우리 둘의 심장소리만 크게 울리는 듯했다. 




이 두근거림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다음 사진을 보자며 카메라 버튼만 하릴없이 눌러다. 그러나 내 눈은 사진이 아닌 카메라를 잡고 있는 그의 큰 손을 보고 있었다. 이 행복한 시간을 1초도 남김없이 누리고 싶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골목을 따라 걸으니 하나 민박이 보였다. 엠티 갔던 곳 중 가장 깔끔하고 넓어서 동기들이 좋아했었다. 밤이 되면 가로등이 켜져서 낮에 보는 벽화마을과 다른 매력이 있었고, 언덕에 위치한 벽화마을 가장 높은 곳에선 별도 잘 보였다.   



        

“유현씨, 저기 하나 민박 보이죠? 시설도 깨끗하고 사장님도 친절하셔요.” 

“그래요? 한 번 가볼까요?”  



         

내가 민박집을 바로 예약하자 그는 고민하는듯하다가 말했다.     

“여름씨가 단번에 결정하는 거 보니 믿음이 가네요. 저도 여기 예약할까 봐요. 여름씨는 엠티 날짜가 언제예요?”



“저는 9월 19일 금요일이요.”

“앗, 저희랑 날짜가 같네요. 사장님, 혹시 저도 같은 날짜에 예약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민박집에 넓은 방이 두 개 더 있어서 우리는 같은 날짜에 방을 예약했다. 엠티 날 술 취한 그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맥주를 함께 마신 적은 많았지만 술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많아질까, 애교를 부릴까, 아님 그냥 잠이 들까. 붉게 물든 얼굴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그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민박집을 예약하고 버스를 타러 내려오는 마지막 길, 물고기 벽화와 길거리 사진기가 보였다.      

“유현씨, 여기서 사진 찍고 갈래요? 길거리 사진긴데 그냥 카메라로 찍는 거랑은 다른 매력이 있어요.”

“좋아요, 여기 서면 되려나요?”


“네. 조금 더 왼쪽으로 와요.” 


     

찰칵-    


 

화면에 정자세로 얼어 있는 우리 둘이 보였다.

“사진 웃기네요. 엄청 어색해 보여요. 유현씨 왜 이렇게 얼어있어요.”

“그러게요. 왜 이렇게 굳었지? 그래도 잘 나왔네요.” 그가 민망한지 어깨를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네. 제 메일로 사진 보냈어요. 핸드폰 번호 알려줄래요? 사진 보내줄게요.”

“네. 핸드폰 주세요.”     





그가 내 핸드폰을 가져간 순간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배경화면에 나온 글자를 보는데 숨이 멎을 뻔했다. 


‘선우 오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여보세요?" 10년 만에 듣는 내 첫 남자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화에 유현이가 안나와서 실망하신 것 같아 데려왔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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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인스타그램 : @bombi_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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