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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Dec 27. 2021

괜찮지 않아도, 견뎌야 했다.

첫사랑을 만난다면(34_소설)

마감 청소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일부터 가을장마라더니, 벌써 비가 오네. 우산도 없는데.” 유현이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 비는 맞아도 좋지. 오늘은 술도 깰 겸 내가 너 데려다줄게.” 

“감기 걸리지 않겠어?”

“감기는 무슨, 얼마나 튼튼한데.” 건물에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운 여름밤, 얼굴에 톡톡 닿는 비에 기분이 좋아서 빙그르르 돌자 유현이는 그게 뭐냐며 풋, 하고 웃었다.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나 사실 비 맞는 건 처음이야.” 그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왜? 비 맞는 거 싫어해?”

“어릴 때 몸이 좀 약했거든. 그래서 할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비는 못 맞게 하셨어.”



“정말? 그럼 지금이라도 편의점 가서 우산 살까?”

“아냐, 비 맞아보고 싶었어. 우리 음악 들으면서 갈래?”



“비 오는데 어떻게 음악을 들어? mp3에 물 다 들어가서 안될걸.”

“가방에 넣고 제일 큰 소리로 틀면 될 것 같은데?” 유현이는 문 닫은 가게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노래를 재생했다. 그의 선곡은 어김없이 성시경 노래였다.     




사람이 몇 명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에, 가방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성시경의 음색이 감미로웠다.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발맞춰 걸었다.     



비 소리와 음악 소리 때문에 대화를 하려면 조금 더 가까이 붙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유현이의 손등과 내 손등이 계속 부딪혔다. 조금은 거친 그의 살결과 토독이며 떨어지는 빗방울, 성시경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자 마음이 간질거렸다.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박 교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잡았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저기, 유현아. 사실 할 말이 있는데….” 그는 말없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장됐지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그의 온기를 느끼며 물었다.

“넌 나 어떻게 생각해? 나는….”  



   

후드득- 갑자기 가랑비가 장대비로 변해서 세차게 내렸다.




“여름아, 잠깐 여기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비 피하고 있을래? 내가 편의점 가서 우산 사 올게.” 그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자.”

“아냐, 혼자 갔다 올게. 너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비 맞으면 감기 걸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듯 빠르게 뛰어갔다.








그가 편의점에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아!” 




뒤돌아보니 선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어… 왜 여기 있어? 그가 왜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고 잠시 사고 회로가 멈췄다.     


“혜지가 너 일찍 갔다고 하더라고. 너 우산 안 가져왔을 텐데 갑자기 비도 오고 그래서….”

“그래서 나 찾으러 뛰어 왔다고? 왜?”



“그냥 네가 걱정이 돼서….”

“… 그걸 왜 오빠가 걱정을 해.”



“미안해, 여름아. 잊어야 하는데 자꾸만 내 마음이 계속 널 향해. 시험공부한다고 너한테 못해준 것들만 자꾸 생각나서 힘들어. 내가 정말 잘할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아냐. 오빠 난…. 난 마음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헤어짐을 상상했어. 수천 번 고민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힘겹게 이야기한 거야. 오빠 좋은 사람인 거 알아. 근데 내 마음은 오빠를 향하지 않아. 그리고 오빠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아, 얼른 가서 쉬어.”




“미안해, 여름아. 끝났다는 걸 아는데 마음대로 잘 안돼. 취했나 보다. 미안해.”

“괜찮아,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 불편해.”



“그래, 미안해. 대신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하자. 이 우산 네가 쓰고 가. 너 비 맞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안 쓸래. 오빠가 가져 가.”




그는 싫다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억지로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고 비속으로 뛰어갔다. 그의 처음 보는 약한 뒷모습이 마음이 아팠지만, 내겐 유현이가 더 중요했다. 내 선의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선우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선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쯤, 거센 비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유현이는 왜 이렇게 안 오지? 편의점에 우산이 없어서 멀리까지 간 건가 싶어 유현이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유현이는 맞은편 편의점에도, 그다음 편의점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현아, 편의점에 없네? 어디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바쁜 것 같아서, 집으로 가는 중이야. 우산도 있는 것 같길래.”



“아, 봤어? 그냥 잠깐 이야기만 나눈 거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힘들게 마음먹은 만큼, 꼭 오늘 유현이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할 말? 혹시 아까 너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던 거? 당연히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뭘 그런 거 물으려고 우리 집까지 와. 비도 오는데 조심히 들어가.”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말들은 가시가 되어 나를 아프게 했다.     



“… 혹시 화났어?”

“내가 뭐라고 화가 나겠어. 화날 일은 없지. 난 그저 힘들고 싶지 않을 뿐이야.”



“힘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아직 내 이야기 안들었잖아.”

“여름아, 미안하지만 듣고싶지 않아. 우리 잘 지내왔잖아. 계속 지금처럼 잘 지내자.”



“혹시 아까 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거 때문에 그래?”

“아니. 그냥 네가 갑자기 그런 말하는 게 불편한 거야. 친구를 잃고 싶지 않거든.” 그는 다정하게, 하지만 단호히 말했다.     




어떻게 거절을 그렇게 담담하고 다정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전화를 끊고 있는 힘껏 유현이 집을 향해 달렸다. 한의원에 도착해서 무턱대고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그의 집이 몇 층인지 알 리가 없었다. 전화를 걸었으나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눈물마저 소심한 나는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입술을 깨문 채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뿐이었다.          



내 마음도 모른 채 쏟아져 내리는 장맛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선우가 준 우산이 있었지만, 그 우산을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흐르는 비 속에서는 내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겠지. 비 소리에 숨어 많은 감정을 비워냈다.          







집에 도착하니 포근한 노란 이불이 보였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몸을 녹히니 조금 진정되는 듯 했다.





그때, 유현이에게 문자가 왔다.    


여름아, 잘 들어갔지? 마음이 쓰이네. 우리, 어색해지지 말자.     



나를 밀어내고선, 내 첫 진심을 듣지도 않고선 예전처럼 지내자고 말하는 그가 미웠다. 하지만 내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관계여도 괜찮았다. 아니, 괜찮진 않지만 견뎌야 했다. 



그가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어떤 일로 마음이 힘든 거라면 그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면 되는 문제였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닌 건 못내 아쉽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리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무턱대고 고백부터 했으면, 그와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을텐데. 내 입을 막아준 거센 비가 오히려 고마웠다. 아주 얇은 끈이라도, 그와 이어져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난번보다는 나은 삶이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그에게 답장했다. 내 감정을 숨긴 채 내가 드러내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다니, 문자란 얼마나 편리한가.     



응. 나중에 준비되면 이야기하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감기 조심하고 수업 때 봐.


         





출처: 핀터레스트 및 직접 촬영

매주 월요일, 목요일에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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