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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Jun 01. 2022

미리 쓰는 유언서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장례 치르느라 힘들지? 마지막까지 애써줘서 고맙고 미안해.        



가장 미안한 사람인 아빠.  

아빠가 지금 속은 무너져 내리면서 겉으로는 얼마나 담담한 척할지 예상되어 더욱 가슴이 아려오네.  


우리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감내했지만, 아빠의 말투가 무뚝뚝하고 거칠다는 이유로 내가 아빠한테 짜증 낸 적이 많았어. 표현이 서툴 뿐, 마음은 따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들며 화낸 게 후회가 돼. 지금은 아빠의 다정한 모습만 기억에 남아. 


독감으로 아팠던 중학생 때, 괜찮냐는 살가운 말 대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번을 사주던 아빠가 생각나. 내가 좋아하는 가게에 가서 평소 하나만 먹으라고 잔소리하던 커피번을 3개씩 사 오며 손에 쥐어주던 날, 그 어떤 약보다 커피번이 더 효과가 좋았어. 지금은 입맛이 변해서 커피번을 좋아하지 않지만, 커피번을 보면 아빠 생각이 나서 꼭 하나씩 사곤 해.  


내 결혼식 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날 향한 사랑을 이야기 한 순간이 참 행복했어. 평소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아빠가 그날은 누구보다 감정적이었기에 아빠 목소리를 영상으로 담지 못한 게 후회가 돼. 


10년 넘게 주말부부 생활을 하며 평일엔 혼자 외롭게 지내고 주말엔 우리를 보러 왕복 4시간 거리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달려온 우리 아빠. 나는 대학생 때 한 시간 거리도 집에 오기가 힘들던데 아빠의 우리 가족을 향한 애정은 정말 대단해.  


애교 있는 딸이 아니라서 어색하다며 미룬 사랑 표현을 내 딸 시연이가 대신해준 것 같아. 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 표현 못했지만 나도 시연이와 같은 마음이야.    



가장 고마운 사람인 엄마.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재능도 많고, 인간관계도 좋은 엄마가 나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한 것을 알아. 난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랐지만 그동안 엄마가 해준 것들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  


고등학생 때 잠이 부족했던 내가 졸면서 머리를 말릴 때, 나의 입에 매일같이 밥을 떠먹여 주던 생각이 나. 그땐 안 먹어도 되는데 왜 귀찮게 하냐고 화를 냈어. 야자 끝나고 밤 11시에 하교하는 날 데리러 온다고 했을 때 내가 알아서 가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짜증을 냈어. 근데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사랑을 알겠더라.  


엄마에게 가장 고마웠던 순간은 내가 친구랑 싸운 뒤 담임선생님께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조퇴한 날이야. 혼낼 수도 있었을 텐데 내 마음을 먼저 토닥여주고 영화관에 데려가 줘서 고마워. 그때 본 ‘7급 공무원’ 영화는 아직도 따뜻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어.  


엄마의 희생과 보살핌으로 큰 내가 많이 배웠다고, 엄마보다 잘하는 게 많아졌다고 잘난 척하며 엄마를 무시하고 가르치려 해서 미안해. 엄마가 인터넷으로 물건 사달라고 했을 때, 좋아하는 드라마 재방송 언제 하는지 물어봤을 때 핸드폰에 치면 다 나온다고 귀찮은 듯 말해서 미안해. 부족한 나를 어엿한 성인으로 만들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가장 아끼는 사람인 동생.  

누나가 어릴 적 했던 꿈 이야기 생각나니? 꿈에 사신이 나타나서 네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내가 죽으면 네가 산다고 말했어. 그 말에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내가 죽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꿈 이야기 말이야. 그전엔 매일 다투기만 했는데 그때 내가 세상에서 널 가장 아낀다는 것을 알았어.  


누나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있어.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래층 아저씨가 층간소음이 심하다고 올라오셨지. 그때 아저씨께서 나보고 뛰었냐고 묻자 내가 아니라고 대답했고, 아저씬 다른 질문 없이 바로 너를 때리셨어.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 ‘내가 뛰었다고 할 걸’ 수십 번도 넘게 자책하고 아저씨가 무서워서 제대로 항의도 못한 내가 원망스러워.  


수능 날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던 너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 못해 준 것도 미안해. 마음 깊이 너를 응원하고 다독여주고 싶었는데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서 네가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낸 건 아닌지 마음이 쓰여.  


그리고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직 대학생인 네가 평생 모은 돈 300만원을 축의금으로 줘서 정말 놀랐어. 그 따뜻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남아있네.  


네가 성실하고 속이 깊은 걸 누구보다 잘 알아. 다만 그래서 걱정되는 것도 있어. 네가 누나 대신 모든 걸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너무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돼. 넌 너만의 즐거움을 누리며 재밌게 살아가렴. 내가 아끼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신랑.  

내 안에 있는 말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사람은 오빠가 유일해. 난 내 속에 있는 진심을 말할 때면 눈물이 나서, 오빠 앞에선 늘 울보가 됐어.  


내가 본 오빠의 첫인상은 느리게 걷고 말도 천천히 하는 사람이었어. 말도 많고 바삐 걷는 나와는 상극이었지. 나와 다른 여유로운 모습에 천천히 스며들 듯 사랑에 빠졌어. 그 여유를 사랑했으면서 결혼 후에는 너무 여유를 부린다고 몰아세워서 미안해.  


오빠가 노래방에서 고음이 안 올라가도 끝까지 진성으로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를 때, 더 깊은 사랑에 빠졌어. 친구들이 음치라고 놀려도 굴하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  


내가 오빠를 만난 지도 8년이 됐네. 8년이면 애정이 식을 듯도 한데 한결같이 오빠가 너무 사랑스러워. 오빠가 축구하고 난 뒤 다리에 근육통이 오는 느낌이 좋다고 할 때, 작은 일로 고집부리고 이긴 뒤에 씩 웃을 때, 게임에 이겨서 활짝 웃을 때, 무거운 다리를 내 배 위에 올리고 잘 때, 무슨 치킨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오빠를 볼 때마다 나는 사랑을 느꼈어.  


내가 한동안 우울의 길을 걸을 때도 묵묵하게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가끔은 오빠가 달콤한 위로를 못한다고 화를 낸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절대 변하지 않는 든든함이 나를 지탱하고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감정 변화가 심한 내가 아래위로 흔들릴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의 딸, 시연아.  

넌 가장 미안한 사람도, 고마운 사람도, 아끼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란다. 넌 나의 전부야. 네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고, 네가 기쁘면 엄마도 기뻐.  


네가 조산아로 태어나서 한 달간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엄마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어. 너를 만나는 면회 시간엔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너를 보는데도 30분이 1초처럼 느껴지더라. 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네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은 날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어. 엄마라고 부르며 기어 오는 동영상을 볼 때면 지금도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단다.  


엄마는 널 임신했을 때 네가 소신 있고 베푸는 사람이 되길 빌었어.  


그러기 위해선 새벽엔 멀리 보고, 낮엔 가까이 보고, 밤엔 내면을 보아야 해.  

새벽엔 멀리 있는 너의 꿈을 바라보며 미래를 계획하고 바른 습관을 위해 나아가렴. 낮에는 가까이 있는 작은 일이 전부인 듯 최선을 다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시간을 보내렴. 밤에는 너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네가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지를 떠올리렴.  


네 이름 뜻처럼, 소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길 바랄게. 나의 전부 시연아.        


나의 소중한 사람들, 슬퍼하는 시간 대신 삶을 더 즐기는 시간을 살길 바라. 사랑해 모두.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저는 1년에 한 번씩 꼭 유언서를 작성해요.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해서요. 이번엔 용기 내어 유언서를 공개해봅니다.ㅎㅎ 아마 제 모든 글 중에 가장 개인적인 글이 아닐까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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