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한 정리를 통한 심적, 시간적 여유
당분간 소설 연재를 중단하고 에세이를 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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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하교하는 길에 우리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친구의 말엔 항상 멈칫했다. 친구와 놀고 싶지만 지저분한 내 방을 보여주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잠시 현관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한 뒤에 쏜살같이 방으로 뛰어갔다.
침대에 널린 옷가지, 책상 위에 쌓인 공책과 과자 봉지들을 모두 옷장 안에 밀어 넣고 친구를 방으로 데려왔다. 5분 만에 나름대로 방을 청소했으나 내 방을 본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게 치운 거야?”라며 웃었다.
큼직한 물건들을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 넣었으나, 옷장 사이로 미처 몸을 다 숨기지 못한 옷자락과 삐뚤빼뚤하게 책장에 꽂힌 책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전선들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내 책상과 사물함도 아주 지저분했기에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정돈되지 않은 어지러운 내 방이 불편하지 않았기에 잠깐의 수치심을 무릅쓰고 청소하지 않는 편안함을 추구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며 인테리어와 집 정리에 관한 책과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왔다.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물건도 사지 않은 채, 물건을 버리고 가구의 배치와 물건 수납방법만 바꿔서 멋진 집으로 변하는 과정을 본 나는 심장이 뛰었다.
그전까진 정리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정리는 그저 쓰레기를 버리고 책장과 침대 위가 깔끔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정리는 더러움을 없애는 ‘청소’였고, 진짜 ‘정리’란 쓸모를 다한 물건을 비우고, 남은 물건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었다.
결혼 전, 나는 한 시간이라도 시간이 나면 집이 아닌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게 집은 씻고 자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박한 정리'에서 집이 변하는 과정을 보며 혹시 나도 카페가 좋은 게 아니라 정돈된 깔끔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 후로 정리 서적을 보며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 입은 지 5년이 되었지만 추억이 담겼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던 원피스와 이제는 더 이상 보지 않는 10년 넘은 청소년 문학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비우고 물건을 수납하는 요령을 터득하여 실행에 옮겼다.
정리 한 지 3달이 되니 집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비우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만 집에 두며 그 물건의 자리를 정해서 가지런하게 정리했을 뿐인데, 내 삶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정리를 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주변인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방에 있는 잡동사니를 버리는 데, 내 마음에 있는 잡동사니 같은 걱정들도 함께 사라졌다. 공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내적 만족감이 내 마음에 여유를 주었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다른 것들에도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예전엔 작은 일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상처받았다면, 지금은 작은 일은 작은 일로 넘길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생겼다. 마음이 단단해지자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었다. 동료의 부탁에 관대해졌으며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그 위에 블록을 엎어버려도 짜증 내는 대신 블록으로 인형 집을 만들어주는 너그러움이 생겼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자존감이 올라갔다. ‘우리는 하루의 1/3을 물건 찾는 데 허비한다.’라는 책이 있을 만큼 우리는 정돈되지 않은 곳에서 물건 찾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나는 학창 시절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이었다. 시간관리를 못해서 늦게 일어난 데다 아침마다 준비물과 머리끈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맸다. 집에서 늦게 나와 용돈을 다 털어서 택시를 타는 날이 잦았다. 반 친구들은 내가 제시간에 들어오는 날이면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지각을 자주 하니 다른 사람의 신뢰도 잃을뿐더러 나 스스로가 못 미더워 자존감이 낮아졌다. 그런데 정리를 하고 나니 지각하는 날이 없어지고 야근하는 날 역시 줄었다. 출근 전 지갑과 차키를 찾느라 헤매지 않고 각종 메일과 파일을 찾는 시간이 줄며 오늘 해야 할 목록이 한눈에 보이자 근무 효율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지각을 하지 않고 제시간에 일을 하게 되자 내가 유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이제 정리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주말이 되면 신랑과 나는 격주로 번갈아가며 자유시간을 갖는다. 예전엔 이 시간에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났는데, 지금은 집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낸다.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떠는 것보다 정리가 주는 마음과 시간적 여유가 내게 더 행복감을 주었다.
물론, 신랑은 자유시간에 게임을 하는데 나는 자유시간에 집안일을 하고 있으니 억울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신랑은 힘쓰지 않고 정리로 인한 여유를 함께 누리기 때문이다. 내가 서적과 텔레비전을 보고 감탄하며 정리를 시작했듯, 신랑도 내가 하는 정리를 보고 기쁨을 느껴서 스스로 우리 집을 정리하게 되길 바란다.
그런 날이 오면 신랑이 자유시간에 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영화 보고 수다 떨며 공짜 정리가 주는 여유를 만끽할 것이다.
사진 출처: 신박한 정리,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