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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Dec 29. 2017

“응애 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퀴어였어요”

- 레즈비언 ‘키위새’ 인터뷰 -


“‘호보호지’가 뭐야?”


지난봄, 스티커를 나눠주던 키위새*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응, 보지를 보지라고 당당하게 부르자는 거야.” 순간 카페 안을 둘러본 건 나뿐이었을까. ‘보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위축되다니. 그녀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젖꼭지 스티커를 붙이고 “Free the Nipple!(젖꼭지에 자유를!)”을 외치던 그녀가 아닌가. 가끔 술자리에서 만날 때도 그녀는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럴 때면 난 기분 좋은 긴장을 느꼈다. 위반의 즐거움이랄까. 지난 삼십 년 동안 성 정체성은 내겐 나 자신조차 속이며 지킨 비밀이었다. ‘호레호즈’* 한번 못하며 살아온 나는 그녀 특유의 당당함, 그 뿌리가 궁금했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스물여섯의 웹툰 작가. 이 세 가지 정보 말고 사실 아는 바가 없었다.


“전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퀴어였어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연예인도, 만화 캐릭터도 다 여자였으니까요. 첫사랑은 열일곱 때? 예쁘고 도발적인 스타일이었어요. 빼박 이성애자라 접근할 엄두도 못 냈죠. 성소수자 모임 처음 나갔을 때 ‘이성애자를 좋아하게 됐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하고 그랬어요. 기초적인 질문이죠. (웃음)”     


기초적인 질문이라며 웃지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난 그 기초까지만 삼십 년이 걸렸고, 10~20대 내내 ‘이러면 안 되는데’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성 소수자는 다 자기 정체성을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응애 하는 순간 그렇게 태어났고, 열여덟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아무 의심 없이 사랑을 시작했다.      


“남자를 보고도 ‘저런 스타일 괜찮군’ 한 적은 있었죠. 모든 매체가 다 이성애 중심이니까 남자를 보면 로맨스물이 떠오르잖아요. 하지만 설레는 건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더 깊었어요.”     


그녀는 '덕후'다. 초등학교 때부터 백합* 만화와 드라마를 찾아봤다. 며칠씩 설레고 앓았다. 문화 작업자가 된 지금 자신도 그런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그녀 역시 이성애를 강요하는 척박한 문화 시장에서 동성애 콘텐츠란 풀 한 포기를 찾던 덕후니까. 호보호지 같은 스티커나 생리 축하 카드를 디자인하는 이유도 퀴어 정체성이라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상의 부당한 요구를 뒤집어보라는 여성주의의 메시지는 ‘퀴어’로서나 ‘여성’으로서나 늘 고민하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퀴어 운동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있지만, 키위새에게 그 둘은 뿌리가 다르지 않다.


“여성주의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되게 단순해요. 난 여자면서 레즈비언이고, 여자랑 살 테니까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여자나 성 소수자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늘 바래오기도 했고요. 게임만 해도 성차별적 요소가 많잖아요. 여성 캐릭터는 특정 신체 부위만 강조해서 그리고, 여자 플레이어란 이유만으로 욕먹기도 하고요.”     


본업인 여성주의 활동과 생업인 웹툰을 병행하다 보니 그녀는 늘 바쁘다. 일주일에 그려야 할 웹툰만 세 개. 그래서 얼마 전 이별도 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서로 배려했던 문제들이 자주 못 보니 서운함으로 쌓여 결국 터져버렸다. 자주 만났다면 달랐을까. 그래서인지 부쩍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나오고 싶다. 집이 없는 20대 레즈비언에겐 껴안고, 뽀뽀하고, 섹스하고, 다툴 장소가 절실하다. 그렇게 따지면 모텔처럼 편한 공간도 없지만, 모텔만큼 들어가기 힘든 공간도 없다. 수군거릴까 봐, 우릴 기억할까 봐, 그 기억으로 약점 잡힐까 봐. 모텔 갈 때 멀리 여행 온 것처럼 사투리를 쓰거나 친구와 온 것처럼 술과 과자를 잔뜩 들고 간다는 레즈 커플의 일화가 흔한 이유다. 그런 식으로 카운터에 “우린 절대 섹스하러 온 게 아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이다.      


“저는 그런 거 없어요. 모텔 가도 애인이랑 같이 계산하고 손 꼭 잡고 엘리베이터 타요. 저는 그냥… 애니어그램 알아요? 전 4번 유형이거든요. 특이할수록 도취되고 ‘나는 특별해’ 이런 성격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남과 다른 걸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남자 친구 있어요?” 같이 닫힌 질문은 그녀도 늘 난감하다. 마음 같아서는 “아니요, 저 여자 친구 있어요.”하고 싶지만, 의도치 않게 폭탄선언이 되는 게 싫다. 그래서 늘 “애인 있어요.”라고 답한다. 그런데도 상대는 “남친, 남친”하며 이야기를 꺼내기 일쑤다. 그때부터는 신경이 곤두선다. 속이려고 속이는 게 아닌데 애인의 성별이 드러나는 키나 직업, 생리 이야기 등을 검열하게 된다. 아는 게이 사진이라도 보여줘야 하나 고민도 한다.      


“어떨 때는 그냥 애인 있냐고 물어보면 이성애자처럼 자연스럽게 여친 사진 보여줄까 싶어요. 상대가 뭐라 하면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성소수자라고 흠을 잡고 그래’ 하는 거죠. 작업실에도 ‘Queer Worker’라고 붙여놓고, 무지개도 달아놨어요. 알 테면 알라지!”     


‘강제적 이성애’ 사회에서 그녀라고 왜 위축되는 일이 없겠는가. 웹툰 연재처에 항의라도 들어올까 SNS에 커플 사진 한 장 올리기 힘들고, 같이 활동하는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성소수자 인권은 ‘나중에’라며 당당하게 차별 발언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상상한다. 이성애자라는 고백이 필요 없듯이 동성애자란 고백이 필요 없는 세상을. 알 테면 알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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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새는 키위새 자신이 지은 별명이다.

*호레호즈 : 홍길동전 ‘호부호형’(呼父呼兄)의 패러디. 레즈비언을 레즈비언으로 부른다는 뜻.

*백합 :  레즈비언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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