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의 까끌한 손목

자해하는 애인을 비난하지 않기까지

by 봄밤


3년 전, 몽글과 연애 초반이었다.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데 몽글이 왼쪽 소매를 끌어당겨 손으로 붙들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목에 뭐가 있길래 숨기냐고 물었다. ‘새 문신을 했는데 마음에 안 드는구나’ 생각했다. 서너 번 물어도 미소만 지을 뿐 답이 없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기회를 노려 소매를 걷었다. 가로로 난 붉은 상처 두 줄이 주황 불빛 아래 드러났다. 순간 고개를 푹 숙인 건 나였다.


어릴 적 친구들은 소위 ‘칼빵’을 하며 은근히 자랑했다. 자기 고통을 그런 식으로 전시한다고 나는 그들을 경멸했다. 목숨을 세일할 때 두 개쯤 사놓은 것은 아닐 텐데, 왜 자기 몸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나. 갑자기 화가 났다.


“코코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코코는 몽글의 팔목에 있는 개 문신이다. 그녀가 12년을 키운 뒤, 질병으로 떠나보낸 개의 이름이기도 하다. 상처는 코코 문신 바로 아래 있었다. 몽글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이후 상처를 발견할 때마다 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고 훈계했다. 화가 날 때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소리쳤다. 밤에는 몽글이 화장실에 갈 때마다 문 앞까지 따라가 지켰다. 발견하는 족족 집에 있는 칼은 식칼이든 커터칼이든 갖다 버렸다.


상처를 볼 때마다 한숨을 푹 쉬고, 매일 약을 발라주며 죄책감도 줘보고, 화장실 갈 때마다 “자해하지 마”라며 감시했지만 늘어나는 상처를 막을 길은 없었다. 상처는 손목에서 팔목, 허벅지까지 보란 듯이 영토를 확장했다. 상처를 보는 내 마음도 일 년쯤 지나자 무뎌지고 무기력해졌다.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수면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하던 몽글이 “봄밤과 있을 때는 잠이 온다”는 말에 황홀했었다. 누군가를 구원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사랑받고 있다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해는 멈추지 않았다. 나를 그만큼 사랑하진 않는 걸까. 마음속에 의심과 불만이 차올랐다.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십 대 학생의 팔목에서 몽글과 비슷한 상처를 봤다. 팔목 전체에 칼자국이 아닌 곳이 없었다. 몽글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아이가 얼마나 관심을 못 받으면 그런 식으로 표현하겠냐”라고 말했다. 순간 몽글의 표정이 굳었다. “자해를 관심받고 싶어서 한다고 생각해?” 그녀의 서늘해진 눈을 보고야 알았다. 한 번도 몽글에게 왜 자해를 하냐고 묻지 않았다는 걸. 처음으로 물었다. 몽글은 왜 자해를 하느냐고.


“친구 중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카락을 뽑는 애가 있어. 그러면 자기 고통이 머리카락을 뽑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 나한테 자해가 그래. 나는 불안장애가 있어서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껴. 지진 날 것 같은 불안감, 뭔가 총 맞기 직전 같은 불안감이 욱하고 올라올 때가 있거든. 그럴 때는 꼭 내가 죽을 것만 같아. 그때 살짝 통증이 있으면 불안의 원인이 명확해지기도 하고, 죽을 거 같다는 생각에서 멀어지기도 해. 물론 이 불안을 다르게 해결할 수 있게 상담도, 치료도 받는 거고.”


몽글은 그날 내게 ‘비자살성 자해’라는 말을 알려주었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보려고 하는 자해였다. 그녀는 자신의 자해 사실을 안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녀를 안전하게 해주고 싶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누구보다 속상한 건 나야. 아픈 것도 나이고. 사람들이 그럴 때는 속상하기보다는 낙담해.” 그녀를 낙담시킨 사람 중 한 명이 나였다. 처음 상처를 본 날, 자흔이 아니었다면 나는 뭐라고 했을까. 어쩌다 다쳤냐고, 얼마나 아팠냐고 물어봤을까. 그런데 난 위로 한마디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몽글이 내 앞에서 상처를 가릴 때마다 부끄러웠다. 작년 초가을, 햇빛이 뜨거운데도 긴팔을 입고 나온 몽글의 왼손을 잡으며 말했다. “전에 내가 왜 자신을 아끼지 않냐고 비난했던 거 미안해. 이제 이 상처로 몽글을 판단하지 않을게.” 그날 이후 몽글은 집에서 더는 손목 아대를 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까끌거리는 팔을 베고 낮잠을 잔다. 예전에는 상처만 봐도 내가 칼로 베인 듯 쓰라렸는데, 이제는 그것이 온전히 그녀의 상처임을 안다.


2년 전, 청소년 자해에 관한 기사가 한창 나올 때가 있었다. 사람들이 “참 문제다”, “심각하다”라고 짧은 논평을 할 때마다 내가 당사자인 듯 움찔했다. 당시 몽글의 자해는 내게 큰 걱정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지을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몽글은 그저 아픈 사람이고, 낫기 위해 매일 약을 먹고, 매주 상담을 가는 사람이다.


처음 상처를 본 날로 돌아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그날로 간 나는 몽글에게 묻는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아프지 않았냐고. 어떤 날은 상처를 보고 침묵을 지킨다. 몽글을 통해 나는 배운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다친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법을. 누군가의 자흔은 자신을 포기해온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온 시간의 흔적이라는 것을. 몽글의 상처를 처음 본 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생의 가장 다정한 날로 만들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몽글의 작고 통통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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