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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Oct 21. 2021

내동댕이친 선물

중3 때였다.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작은 여자애가 길을 확 가로막으며 말했다. “언니가 아까 왜 그랬는지 알아요.” 일자 앞머리에 단발머리, 짧게 줄인 교복 치마, 쫙 벌리고 선 다리. 당돌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애였지만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갔다. 그날 점심시간에 1학년 지은이가 날 불러 다짜고짜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고백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야.”


나는 얼떨결에 그 아이가 선물한 초코칩 쿠키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그러자 지은이는 등을 휙 돌려 복도를 달려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은이 그것이 그새 친구들한테 말한 걸까. “네가 뭘 아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아이는 돌아섰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 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걸까? 내가 사실 지은이를 좋아하는 걸 아는 걸까? 그런데도 주위 시선만 신경 쓴다고 힐난하는 걸까? 그날부터 난 학교가 끝나면 그 아이를 만났던 골목을 배회했다.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아냐고.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친구들과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갔다. 인적이 끊긴 구 사거리의 오락실이었다.


“네가 뭘 아는데?” 그 애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날 뻔히 쳐다보더니 또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 애는 뭔가 아는 게 분명했다. 그날 이후 난 매일 그 오락실의 초록빛 인조가죽 소파에 앉아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애는 날 본척만척했지만 상관없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나처럼 매일 출근하는 한 남자애가 손짓하며 불렀다. 가까이 가니 동전에 실을 묶어 넣었다 뺐다 하며 공짜 게임하는 법을 알려줬다. 난 오락은 안 한다고 했다. 남자애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오락실에 왜 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사라지는 내가 변했다고 했다. 나는 아무  없이 미소를 지었다. 매일 롯데리아 2층에 앉아 H.O.T 얘기를 하는 너희보다 나를 안다는  애가  궁금하다고 말할  없었다. 이주쯤 지나니  애가  손바닥에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으며 기억하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우린 매일 오락실에서 만났다. 싱거운 장난도 치고, 부모님 때문에 힘든 얘기도 나누고, 손도 잡았다.  애가  뒤에서 안을 때면 심장이 터지는  같았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역시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애가 교복 바지를 바짝 줄여 입은 마른 남자애를 애인으로 데려왔을  고개를   없었다.  애에게 했던 모든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고백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야.”란 말은 사실 나를 향해했던 말이었다. 십 대, 이십 대 내내 난 좋아하는 여자의 꽁무니만 따라다닐 뿐 변변찮은 고백 한 번 못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낙관은 늘 그녀들이 다른 연애를 시작하며 무너졌다. 짝사랑은 딱 거기까지였다. 진심을 말하지 않고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고는 어떤 관계에서도 안정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난 오랫동안 실패의 원인을 내 성별에서 찾으며 ‘내가 남자였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 고백을 할 텐데’하는 생각에 매달렸다. 하지만 내가 사랑에 실패한 건 동성애자여서가 아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


오랜 시간 내가 내동댕이친 건 초코칩 쿠키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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