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때였다.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작은 여자애가 길을 확 가로막으며 말했다. “언니가 아까 왜 그랬는지 알아요.” 일자 앞머리에 단발머리, 짧게 줄인 교복 치마, 쫙 벌리고 선 다리. 당돌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애였지만 무슨 소리인지 짐작이 갔다. 그날 점심시간에 1학년 지은이가 날 불러 다짜고짜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고백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야.”
나는 얼떨결에 그 아이가 선물한 초코칩 쿠키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그러자 지은이는 등을 휙 돌려 복도를 달려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은이 그것이 그새 친구들한테 말한 걸까. “네가 뭘 아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아이는 돌아섰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 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걸까? 내가 사실 지은이를 좋아하는 걸 아는 걸까? 그런데도 주위 시선만 신경 쓴다고 힐난하는 걸까? 그날부터 난 학교가 끝나면 그 아이를 만났던 골목을 배회했다.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아냐고.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친구들과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갔다. 인적이 끊긴 구 사거리의 오락실이었다.
“네가 뭘 아는데?” 그 애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날 뻔히 쳐다보더니 또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 애는 뭔가 아는 게 분명했다. 그날 이후 난 매일 그 오락실의 초록빛 인조가죽 소파에 앉아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애는 날 본척만척했지만 상관없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나처럼 매일 출근하는 한 남자애가 손짓하며 불렀다. 가까이 가니 동전에 실을 묶어 넣었다 뺐다 하며 공짜 게임하는 법을 알려줬다. 난 오락은 안 한다고 했다. 남자애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오락실에 왜 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사라지는 내가 변했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매일 롯데리아 2층에 앉아 H.O.T 얘기를 하는 너희보다 나를 안다는 그 애가 더 궁금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주쯤 지나니 그 애가 내 손바닥에 자기 이름과 집 전화번호를 적으며 기억하라고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우린 매일 오락실에서 만났다. 싱거운 장난도 치고, 부모님 때문에 힘든 얘기도 나누고, 손도 잡았다. 그 애가 날 뒤에서 안을 때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 애 역시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난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애가 교복 바지를 바짝 줄여 입은 마른 남자애를 애인으로 데려왔을 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애에게 했던 모든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고백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야.”란 말은 사실 나를 향해했던 말이었다. 십 대, 이십 대 내내 난 좋아하는 여자의 꽁무니만 따라다닐 뿐 변변찮은 고백 한 번 못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낙관은 늘 그녀들이 다른 연애를 시작하며 무너졌다. 짝사랑은 딱 거기까지였다. 진심을 말하지 않고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고는 어떤 관계에서도 안정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난 오랫동안 실패의 원인을 내 성별에서 찾으며 ‘내가 남자였다면, 지금이라도 달려가 고백을 할 텐데’하는 생각에 매달렸다. 하지만 내가 사랑에 실패한 건 동성애자여서가 아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였다.
오랜 시간 내가 내동댕이친 건 초코칩 쿠키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