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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04. 2021

나의 늙은 강아지, 모모

모모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 건 재작년 가을 11살이 되던 해였다. 모모가 밥을 안 먹는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고 부모님집으로 간 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헥헥 소리를 내며 달려들던 모모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 식탁 밑, 책상 밑까지 온갖 구석을 뒤졌다. 25평 아파트에서 모모를 발견한 건 삼십 분 후였다. 평소에는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던 세탁실 구석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강아지는 죽을 때가 되면 숨는다는데 그런 걸까.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모모를 들어 수건으로 감쌌다.    

           

내가 모모를 처음 만난 건 스물네 살 때였다. 시츄와 치와와가 섞인 갈색 모모가 지나가면 동네 할머니들은 "잡종이네, 잡종"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커다란 눈망울과 촉촉한 검은 코를 가진 세상 가장 예쁜 개였다. 모모란 이름도 내가 지어주었다. 나는 모모와 엄마 집에서 7년을 살고 독립해 나왔다. 독립한 첫해는 주말마다 모모를 보러 갔다. 그러던 것이 이주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뜸해지다 모모가 나를 반기지 못할 만큼 아플 때가 돼서야 간 것이다.                

다음날 동물병원에 갔다. 의사는 모모의 숨소리가 불규칙해 심장이 좋지 않은 걸로 의심이 가지만, 나이가 많아서 수술하거나 약을 먹이면 약해진 혈관이 터질 수 있다고 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데려가 잘 보살피라는 말이 끝이었다. 나흘간 숟가락에 꿀물을 만들어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모모의 입에 넣어줬다. 저러다 아파서가 아니라 굶어 죽는 게 아닐까. 먹은 게 없어 기운도 없을 텐데 모모는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밤새 집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데리고 와 안으면 잠이 드는가 싶다가도 깨어보면 어둠 속에서 모모 발소리만 들렸다. 왜 저렇게 한없이 걷는 걸까. 아픔을 잊으려고? 죽을 자리를 찾으려고? 모모는 온몸으로 고통을 말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엄마 집에 머문 지 5일 차. 서울집이 걱정되어 잠시 다녀온다 했더니 동생이 눈물을 글썽였다. 아무래도 모모가 곧 떠날 거 같다며 있어 달라고 했다. 나는 단도리 못하고 온 집안일 몇 가지와 아픈 몽글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 그만 화를 냈다. 모모가 왜 죽냐고, 아플 때마다 그런 것처럼 올해도 넘길 거라고, 마음 단단히 먹자고 말하고 집을 나서는데 무슨 짓인가 싶었다. 아무것도 못 먹는 개를 두고 올해를 넘길 거라니.                


서울집에 도착하자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쩝쩝 소리를 내며 엄마 손에 담긴 사료를 먹는 모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밤새 보고 또 봤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몽글의 강아지가 죽기 직전 갑자기 밥을 잘 먹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을 애써 눌러 담았다. 밀린 원고를 빨리 쓰고 모모에게 가겠다는 일념으로 핸드폰을 꺼뒀다. 다음날 세 시쯤 핸드폰을 켰을 때 엄마에게서 부재 중 전화 6통과 모모의 몸이 굳고 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모모의 네 다리는 이미 경직되어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못해 온몸이 흔들렸다. 반쯤 뒤집힌 눈을 보며 모모를 불렀지만, 고통이 잠식한 뒤였다. 엄마는 아침부터 이랬다며 안락사를 해주자고 말했다. 나를 찾으며 종일 마음 졸였을 엄마와 고통받았을 모모를 생각하니 망설일 새가 없었다. 평소 가던 곳이 삼십분 거리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아니... 어쩌다” 의사의 한 마디에 죄인이 된 듯했다. 안락사하는 게 맞을까. 혹시 살 수도 있는 개를 죽이는 건 아닐까. 의사가 이 개는 살릴 수 없다고 편히 보내주는 게 맞다고 말해줬으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의 선택이었다.                


주사를 놓자 경련이 멈췄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모모,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 이 말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가 마지막 주사를 놓을 테니 나가 있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곁에 있고 싶다고 했다. 떠나는 마지막 길에 아무도 없으면 서운할 거 같았다. 모모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부디 편안한 곳으로 가라고. “왜 눈을 안 감을까요?” 내 질문에 의사는 원래 강아지들은 눈을 뜨고 죽는다고 했다. 원래 그렇게 죽은 건 뭘까. 죽음에도 정해진 방식이 있는 걸까. 나는 눈을 뜬 모모가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화장터에 가는 내내 담요에 폭 감싼 모모의 이빨이 여전히 하얗고 단단해 꼭 십 년은 더 살 것만 같았다.               

회사에서 동생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해가 졌다. 동생은 모모를 안고 울며 꼭 살아있는 거 같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화장터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우나 보다. 꼭 살아 있는 거 같아서. 단단하게 굳은 몸, 숨 쉬지 않는 가슴. 누가 봐도 죽은 강아지를 안고 우린 꼭 살아있는 거 같다고 말하며 엉엉 울었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 모모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모모의 유골은 할아버지 산소 옆에 묻었다. 모모가 처음 집에 왔을 때 "개새끼를 어떻게 집안에서 키우냐"며 발로 걷어찼던 아빠는 우는 딸들을 보다 못해 해가 잘 드는 곳에 모모의 산소를 만들어줬다. 매실나무 앞에 만든 작은 봉분에 잔디를 입혀 놓아 제법 산소 같다. 아빠는 가장 해가 잘 드는 데 묻었다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듣던 양지바른 곳에 묻힌 나의 늙은 강아지 모모.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모모가 어딘가 꼭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햇볕이 잘 든다는 매실나무 밑에 묻힌 모모에게 말을 건다. 거기서 편안하냐고. 네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나는 유튜브에 '나이 든 개가 타기 좋은 유모차'를 검색했을 텐데. 그렇게 산 유모차에 너를 태우고 산이고 강이고 바다고 다녔을 텐데. 그걸 못해서 길에서 유모차를 탄 늙은 개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대답 없는 모모의 산소에 긴 햇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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