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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06. 2021

조선소 노동자, 우리 이모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동생과 나는 충남 청양에 있는 이모 집에 맡겨졌다. 당시 이모는 한 대학에서 청소 일을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초등학생 1, 2학년인 동생과 나를 나란히 자전거 뒷자리에 태웠다. 동생과 나는 여름방학 내내 이모가 일하는 학교 교정에서 놀았다. 자전거의 페달에서 오른발을 떼 왼쪽으로 옮기며 이모처럼 우아하게 땅으로 착지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자전거를 탈 때 이모는 날쌘 바람돌이 같았다. 어리지만 30kg씩은 나갔을 아이 둘을 사십 대 여성이 혼자 싣고 다녔다니. 가끔은 내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그 여름 우린 분명 그 자전거를 타고 이름 모를 대학에도 가고, 시장에도 갔다. ‘억척’이라는 단어는 누군가 우리 이모를 보고 만든 단어가 아닐까 싶다.    

 

이모는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고향은 경기도 수원인데, 지금 사는 곳은 통영이다. 경기도 수원에서 충청도 청양으로, 다시 통영으로. 결혼한 남자 따라 옮겨 다니며 바뀌던 주소지가 이모의 삶터가 됐다. 바다가 가까운 통영에서 육십 대가 된 이모는 배를 닦는 일을 한다. 일하다 보면 온몸에 “뺑기(페인트)가 묻어” 한동안 내가 안 입는 옷은 다 이모 작업복으로 보내기도 했다.


엄마는 2, 3년에 한 번 이모네 갈 때마다 “왜 이렇게 멀리 가서 사냐”며 한탄을 하지만, 보자마자 “왔나” 하며 찰진 사투리를 던지는 이모는 경상도 사람이 다 됐다. 몇 년 전 생선을 ‘고기’라고 부르는 이모를 보며 나는 이모의 이주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이번 설은 통영 이모네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장장 8시간을 달려갔다. 엄마는 이모네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언니, 보일러 좀 틀자” 그 소리에 이모가 헛웃음을 친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 보일러가 어딨노” 가족이라도 남의 살림은 이토록 먼 걸까. 보일러가 없어 이모가 아침마다 물을 끓여 머리를 감았다는 사실을 올 때마다 감쪽같이 잊는다.


세상에 보일러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우리 이모라니. 우려와 달리 바닥마다 전기장판이 깔린 방안은 훈훈했다. 하지만 전기장판이 없는 거실과 부엌, 화장실은 맨발로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이모는 내가 부엌에 나갈 때마다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어 던져줬다. 이모가 멀지만 따뜻한 남쪽 지방에 살아 참 다행이란 생각을 처음 했다.      


겨울에도 반소매, 반바지만 입는 나와 달리 이모는 집에서도 두툼한 솜바지와 양말 두 켤레를 신고 생활했다. 위에는 가벼운 스웨터와 패딩 조끼를 입는다. 나는 팔의 움직임이 편한 패딩 조끼야말로 이모다운 패션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한시도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지 않았다.


부엌에서 일하거나 안 보이면 마당 텃밭에 나가 뭔가를 캐왔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땅에 바싹 엎드린 시금치와 봄이면 유채꽃이 핀다는 겨울초를 뽑아와 밥상에 올렸다. 할 일이 떨어지면 마당에 있는 강아지 보리와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러 갔다.     


지난 20년 동안 조선소에서 일하던 이모는 조선업계가 불황에 빠진 이후 해고를 당했다. 요즘은 일이 있을 때 부르면 나간다. “이번에는 일요일에 나오라든데 가믄 며칠이나 일할 수 있을까.” 헤아리는 이모의 하루하루가 내겐 아득했다. 비정규직에서 호출형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한 이모의 사회적 위치가 읽혀 가슴이 답답했지만, 이모는 불러주는 데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가족 중 누군가 힘들 때면 돈을 보따리로 갖다주던 사람이 이모였다. 매달 드린 할머니 용돈, 조카들 대학 갈 때마다 보태준 등록금, 우리 엄마한테 사준 대형 텔레비전과 냉장고. 나이 68세가 되어서야 나를 위해 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모는 올해 처음으로 한라봉 한 박스를 사 먹었다. 밤마다 부엌에서 가져온 차가운 한라봉을 까주며 먹으라는데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았다. 한라봉 하나는 그냥 온전히 이모 것이었으면 했다.      


“좀 꾸미고 다녀라. 화장도 하고, 눈썹도 좀 밀고. 눈썹이 빗자루 같아서 어떤 남자가 쳐다보겠냐.” 이모가 날 볼 때마다 하는 레파토리다. 남자 때문에 지지리 고생한 이모가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내지르고 싶지만, 또 한 번 그 말을 삼켰다. 귀가 보이는 짧은 숏커트 머리에, 고봉밥을 먹고, 화장은커녕 로션도 안 바르는 이모처럼 살고 싶다는 등짝 맞기 딱 좋은 소리도 굳이 하지 않았다. 이모가 내게 내내 하는 소리가 “너는 나처럼 궁상맞게 살지 마라” 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한라봉이 가득 담은 봉지를 건네며 배웅하는 이모를 지그시 안았다. 한사코 거절하는 한라봉 봉지를 기어코 쥐여 주는 사람, 보고 있으면 절로 생활력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사람. 패딩 조끼  부쩍 마른 이모가 두 팔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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