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밤 Jan 06. 2022

성소수자를 보지 않을 권리?

2011년 영구임대아파트를 거점으로 문화 활동할 때 일이다. 동료A가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너무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힘든 이유를 물으니 되레 질문이 돌아왔다. “여기 뭔가 다른 거 모르겠어요? 휠체어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요.” 뜬금없는 휠체어 타령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우리 둘만 있는데도 속삭이듯 말했다. “장애인들이 다른 데보다 훨씬 많은 거 못 느꼈어요?” 당연한 얘기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입주 조건 중 하나가 '장애인등록증이 교부된 자'이니까. 그는 “들어서자마자 나는 냄새부터 다르다”고 했다. 곳곳에 술 먹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집에서 아파트 화단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낯선 장애인들을 마주쳐야 하는 것도 곤혹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장애인들이 일상의 공간에서 얼마나 장애인과 만나지 못하는지를 알았다. 마찬가지로 늦은밤 술에 취해 길에서 키스하는 이성애자들은 숱하게 봤지만, 동성애자를 본 적은 없다. 동성애자들이 키스를 덜 해서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애인과 지붕 없는 곳에서 포옹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누가 특별히 말리지는 않지만, 공공의 장소에서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이다.


동료A가 떠오른 건 지난 보궐선거(2021년)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안철수 씨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TV토론에 나와 “퀴어 축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곽에 나가 퀴어 축제를 하면 특화된 곳이 되어 명소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명소”가 누구를 위한 명소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성소수자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안 씨의 논리대로라면 장애인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어려움을 느낀다는 동료A의 권리 역시 존중받아야 하는가?


성소수자 친구들의 반응은 호탕했다. “퀴어 특구를 만들면 편의점만 가도 전 애인 만나는 거 아니야?” 퀴어들이 모여 산다는 건 재미난 발상이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경우에 한정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미 나와 친구들은 퀴어 특구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은 집이나 친한 친구들과의 자리로 늘 한정적이다. 나를 만나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난 성 소수자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그곳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내 정체성, 영혼의 중요한 한 부분은 그곳에서 드러날 수 없다. 퀴어축제는 일 년에 단 하루 내 물리적인 위치와 영혼의 위치가 일치하는 날이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고, 내 영혼을 외곽에 방치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보지 않을 권리”를 위해 그 하루를 양보한다면, 나머지 364일의 일상에서 나는 뭘 양보하게 될까?


가끔 내게 “장애인, 트랜스젠더와 달리 동성애는 숨길 수 있어 더 살기 편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누가 더 불행한가를 논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자신이 장애인, 트랜스젠더를 모두 식별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도 황당하다. 동성애가 드러나지 않는 건 고유의 특성이 아니라 차별의 결과다. 사랑의 본질이 비가시성이라면 이성애자도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조금만 가까워져도 내가 누굴 만나고 누구와 사는지, 특히 ‘남친’은 없는지 궁금해 한다. 궁금해 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다. 애인이 아파 모임에서 나갈 수 없을 때 내가 다른 이유를 대야 한다면 그것은 차별 때문이지 동성애자라서가 아니다. 누군가 성소수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퀴어축제를 하라는 말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퀴어축제는 존재를 드러내는 일, 그 자체다.


점잖게 말했지만 TV토론에서 정치인한테 “보고 싶지 않으니 외곽으로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썩 나쁘다. 그런 그가 나의 인권을 존중하고, 차별을 반대한다고 말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는 성적으로 문란한 퀴어축제로부터 아동,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료A 역시 자신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냄새가 나고, 더럽기 때문에 싫다고 말했다. 동료A와 안 씨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는 이상, 장애인과 성소수자가 싫은 이유는 차고도 넘칠 것이다. 아파트 화단의 쓰레기 투기 문제는 영구임대아파트 뿐 아니라 많은 아파트의 골칫거리다. 나는 그 문제로 CCTV를 설치한 아파트를 여럿 보았다. 문란함이 정말 문제라면 도심 한가운데서 헐벗고 물총을 쏘는 물총축제나 남근 모양의 술을 파는 고추축제는 왜 논란이 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문란함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안 씨의 발언 이후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 김기홍 씨는 SNS에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제 세상을 떠난 그의 글을 더는 볼 수 없다. 나와 내 성소수자 친구들은 헤어질 때마다 죽지 말고 다음에 꼭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사람을 차별을 이유로 잃은 기억이 있다. 언제까지 이런 논쟁을 들어야 하는 걸까. 선거에서 “동성애 찬반”, “퀴어축제 찬반”을 묻는 행태가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는 후보가 아니라 그 질문을 거부하는 후보를 만나고 싶다.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닙니다”, “퀴어축제만 의견을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간명한 대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더 잃어야 하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조선소 노동자, 우리 이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