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요즘 책을 읽을 때마다 감흥이 없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입에 바른 소리들. 이미 그런 말들은 연금술사와 싯다르타에서 들을 만큼 들었고, 나머지는 변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러한 모양만 다른, 하지만 결국 같은 말들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 내 안에 그저 말로만 떠돌아다녔을 뿐,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아는 체만 할 줄 아는 쭉정이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테다. 텅 비었다는 불안함을 잊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나를 채워줄 말들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스스로가 텅 비게 된 것은 말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들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더 이상 새로 배울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배운 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오히려 너무 많은 책들, 너무 많은 말들이 걸어야 할 길을 흐리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군살을 빼고 핵심 만을 남겨야 한다. 그리고 그 몇 가지의 철칙을 틈나는 대로 새기며 내 삶으로 빚어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럼 무엇을 새겨야 할까.
지금까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며, 그러니 혼자 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23년 여름, 모로코로 가는 길에 공항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한국에서 10000km 떨어진 낯선 땅에서 땡전 한 푼 없는 맨몸이 되었다. 그렇게 2주를 무일푼으로 여행을 하며, 내가 얼마나 많은 도움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그 도움이 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 기대어 살아간다. 만약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왔다고 자신한다면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팔로 밥을 먹기에 그 힘으로 머리가 살 수 있고, 다리가 굳건하게 지탱해 주기에 팔 또한 살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긴밀하게 이어져 살아간다. 그러니 '세상은 한 몸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 우리 모두는 한 몸이다.
세상이 한 몸이라는 사실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근본부터 바꾸게 한다. 애초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나와 한 몸이기에 너는 곧 나다. 더 이상 너의 아픔은 없다. 너의 어리석음도 없다. 너의 책임도 없다. 모두 나의 아픔이자, 나의 어리석음이며, 나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너의 삶에 함부로 개입할 생각은 없다. 다리의 아픔을 본 팔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팔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나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서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진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좋고, '나'들에게도 좋은 일이 된다. 모두와의 이어짐을 잊지 않고, 세상을 더 좋게 하기 위한 나의 책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전부이다.
나의 책무란 무엇인가. 나는 태어나며 어떠한 역할을 받았나.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목적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존재의 이유가 없다.'라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목적은 없지만,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내가 가지게 된 것들은 있다.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성정, 진심을 담아 말하는 습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 교사라는 직업. 내가 가진 것들을 살펴보고 '내가 아는 것을 전하여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아지는 일'을 내 존재의 이유로서, 세상을 이루는 역할로서 삼기로 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벗어나려고 억지를 쓸수록 나만 힘들어진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흐름에 몸을 맡긴다면 삶에는 힘 들일 것이 많지 않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 내 멋대로 살고 싶은 욕심이 나를 힘들게 한다.
더 큰 쾌락을 좇는 욕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더 내려놓기 힘들다. 못된 버릇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만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한다. 아직 그 정도 그릇이 아님에도 음식을 줄이고, 늦잠을 줄이고, 유튜브를 줄이려는 과한 노력이 더 큰 식탐과 게으름과 시간 낭비를 만든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자책이 되어 나를 상처 입힌다. 나아지려고 애쓸 필요 없다.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의 평평한 길을 꾸준히 걷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느새 높다란 구름 밑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는 것이 사람의 성장이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단단해지는 한 가지 믿음, 그것은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은 이미 아이들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와 같아서 정작 아이 스스로는 본인 마음속에 진주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니 세상 빛을 먼저 본 누군가가 진흙을 걷어 아이의 마음에 진주가 있음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 단 한 번,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한 번이라도 자기 마음속의 진주를 본 아이는 죽는 날까지 그 빛을 따라 살아간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 안에도 그러한 빛이 있다. 내 안의 빛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는 길이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을 밖이 아닌 나에게서 구하는 태도를 새겨야 한다.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다른 사람이 주는 인정이다. 인정을 바라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끝없이 남과 비교하고, 나를 돋보이려 든다. 나를 돋보이려는 욕심에 빠지면 삶의 중심이 나에서 남으로 옮겨진다. 행동 하나하나, 선택 하나하나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나로 사는 자유를 잃게 된다. 나의 공을 키우고, 나의 과를 줄이며 내 삶을 점차 가짜로 채우게 된다. 결국 나를 잃게 한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괴롭다면 그 또한 나를 다스려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지금은 휘청거리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다. 나와 다르게 잘못을 저지르는 저 사람 또한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같다. 상류의 물은 언젠가 하류로 흐른다. 우리가 상류와 하류의 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강'이라고 하듯 너와 나는 같은 '사람'으로서 동족이자 형제다. 그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깨닫지 못했을 뿐이고, 화내거나 속상해할 것이 아닌, 잘못임을 가르쳐야 할 일이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 만을 보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의 얄팍한 한 겹이 아닌 삶 전체를 바라보고 존중할 수 있는 눈과 그릇이 필요하다.
불운으로 인해 괴롭다면 그 또한 나를 다스려야 한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 어떠한 의미도, 목적도 그 안에 담기지 않는다. 그저 마땅히 일어날 때가 되었기에 일어날 뿐이다. 거기에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나'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고통스러운 순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속에서 배울 점을 찾아 딛고 일어설 것인지,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인지는 나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내가 힘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나의 시선이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닿아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과 아직 겪지 않은 힘듦을 모조리 늘어놓고 스스로를 짓눌렀다. 그것들을 다 치우고 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견뎌야 할 짐은 생각보다 그리 무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세상은 어차피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 만을 허락한다. 나 또한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골라간다.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나의 느낌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어떤 일도 견뎌낼 수 있는 빛이 내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편하려는 마음이 나의 능력 없음, 세상의 부조리함을 핑계 삼아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나약함이 만드는 왜곡을 넘어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성실함이 내게 필요하다. 언제나 다스려야 하는 것은 '나'뿐이다.
머지않아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아직도 여전히 단순하지 않고, 초연하지 않으며,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해악을 입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며, 정의롭게 행하는 것만이 지혜라는 확신도 갖고 있지 못하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죽는 것이 무섭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살지 못해서 후회하며 죽을까 봐 무섭다. 이런 두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내 수명의 심지는 빠르게 타 들어가고 있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 또 중요하지 않은 것에 한눈을 팔고, 주어진 것에 불평을 하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기보다는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쌓아두지 않고, 살아낼 것이다. 지식을 찾아 떠도는 거렁뱅이의 삶을 끝내고, 책과 사람과 겪음을 채찍 삼아 나를 호되게 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남긴 자국 하나하나에 향기가 배어 나오는, 그로 인해 나와 '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