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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 - 한강

by 보멍

1. 인간은 무엇인가


소설 속에는 '인간 답지 못한 인간'이 숱하게 등장한다. 설마 같은 사람을 쏘겠어, 설마 뼈가 드러난 부위인데 더 고문을 하겠어, 설마 뺨을 더 때리겠어... 같은 인간이기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설마의 순간'을 넘어서는 이들. 이들을 마주했을 때 먼저 이름 모를 역겨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의구심이 든다.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은 나와 이들을 구분해서 관찰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섰다는 말일 테다. 근데 과연 나는 그들과 다른가? 내가 주었던 무수한 상처들을 떠올린다. 말 받아 주는 게 귀찮아서 아이들의 말을 못 들은 척했던 쉬는 시간. 외로움 속에 죽어가던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만나기 싫어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 마지못해 얼굴을 보였던 그 밤. 과거의 잘못으로 나에게 전전긍긍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면서 이용해 먹었던 어제. 나에게 먼저 손 내미는 친구의 연락이 부담되어 끝내 무시해버리는 매일. 사소해 보이지만 그들과 나는 정도와 범위가 다를 뿐 그 행동에 깃든 비인간성은 결국 같은 것이다. 소설의 표현대로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면, 만약 나도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힘을 지녔다면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들과 나 사이에 그은 선을 지운다. 그들이 보여준 잔혹함은 곧 내가 아직 드러내지 못한 잔혹함 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숭고함도 잔혹함도 함께 지니고 있는 존재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는 인간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무엇이 우리를 숭고하게 하는지, 무엇을 잃었을 때 우리는 잔혹해지는지를 안다면 더 선명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속에 이미 완성된 상태로 가지고 있다면 왜 우리는 아직도 애써 나아가는 거지요?"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하는 게 큰 차이지. 인식의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졌을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저기 거리를 걸어 다니는 두 발 달린 동물 모두를, 그들이 똑바로 걷고 새끼를 아홉 달 배 속에 품고 있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개미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벌인지! 그들 하나하나 속에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지. 그러나 각자가 그 가능성을 예감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그것들을 의식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그 가능성들은 자기 것이 된다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간인 것이 아니다. 본인 안에 숨겨진 완성된 상태를 깨닫고 그것을 살아내려고 노력한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이라 불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답을 지니고 있다. 친구의 것을 빼앗아도 될까? 친구를 때려도 될까? 친구를 못생겼다고 놀려도 될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래도 된다.'라고 대답하는 아이는 없다. 이것은 결코 교육 결과나 주입된 사상 같은 게 아니다. 갓난아이라도 엄마가 울면 따라 운다. 나와 연결된 존재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원리, 즉 본능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바람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이치와 같다. 하지만 자연과 다르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여백이 있어 그곳에 이치에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불순물이 자꾸 끼어든다. 주로 나만을 생각하게 하는 욕심과 남과의 연결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그것이다. 불순물은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욕심과 무지에 끝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흔들리며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해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보는 인간다움이다.


KSH_1738.jpg 상처투성이 나무처럼




2.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닌

'소년이 온다'는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이들의 투쟁 이야기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만들려는 거대한 힘과 투쟁한다. 일곱 대의 뺨으로, 살아남는 것으로, 인터뷰에 응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서로를 용서하는 것으로, 심지어 죽음으로서도 말이다. 인간 답지 못한 자들의 눈엔 모두가 숭고함이 없는 고깃덩어리로 보인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니 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행동이 어딘가 건방져 보인다. 그래서 폭력과 억압을 통해 이야기한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너희도 우리와 같은 배고프면 내 배를 먼저 채우려고 하고, 총 쏘면 내가 먼저 도망가려고 하는 고깃덩어리 아니냐고. 하지만 그 모진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은 숭고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쏟아지는 치욕스러움을 견디고 나아간다. 한 줌의 식사 때문에 다투면서도 '우리는 죽을 각오를 했었잖아요.'라는 말을 내뱉는다. 왜 아직 살아 있느냐는 물음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다. 그때 도청에 남아있기를 선택한 이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려 본다. 죽음 만이 유일하게 인간으로서 남을 수 있는 길이었을 그들의 마음을.



그렇다면 이 소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다. 숭고함을 쫓는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강함을, 여전히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정신이 흩어지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여전히 전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자본에 압도되어 스스로조차도 가격을 매기는 세상이라지만, 사회 또한 한 사람의 개인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내면의 빛을 따라 걸었던 이들의 자취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어딘지 모를 구석에서라도 이어지고 있다. 가치 있는 일은 원래 힘이 드는 법 아니겠는가. 앞선 선배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고, 잇고, 살아낸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다. 지금까지 늘 얻어먹기만 하는 '어른이'였지만 오늘은 한 번 내가 밥을 사본다. 가족이 된 지 12년 차이지만 아직도 어색한 매형의 팔을 붙잡는다. 말이 잘 안 떨어져서 입술만 움싹 달싹하다가 간신히 '그동안 감사했어요.' 두 마디를 건넸다. 대천 해수욕장이 하얗게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무언가가 내 안에서 녹아내렸다. 이 작은 한 마디에도 힘이 있구나. 우리는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인간이다. 그리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으련다. 그게 내가 고깃덩어리가 아님을 증명하는 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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