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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며 산다는 건

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by 보멍

지금을 살게 하는 글쓰기

아이들과 절기를 따라 살고 있다. 절기를 따라 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내가 주변을 잘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3월 20일, 춘분을 맞이해 아이들과 함께 봄 냉이를 캐기로 했다. 냉이의 생김새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식물과 어떻게 구분하는지, 이런 것들을 함께 배우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다 같은 풀떼기로 보였지만 아이들의 엄격한 지도 아래에서 끝날 때쯤에는 어느 정도 냉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수업 이후로 길을 걸을 때마다 냉이를 찾게 된다. 냉이는 정말 온갖 군데에서 다 나는데 길가 화단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새에서도 냉이는 자라고 있었다. 나는 30년을 살면서 된장국에서 말고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냉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많은 곳에 냉이가 있었다는 게 충격이다. 난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 놓치는 일 하나 없도록 책임감 있게 살았는데. 내가 꼭 붙잡고 살던 것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30년 동안 냉이를 보지 못했던 이유, 그건 내 주변을 감각하는 섬세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손도 멀쩡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상에 속아 그 멀쩡한 감각기관을 제대로 쓰고 있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지하철에서 주로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본다. 그런데 하루는 너무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하느라 책을 챙기지 못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전날에 충전을 안 하고 자서 핸드폰 배터리는 10퍼센트 남짓 남아있다. 오늘 하루 최악이네, 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다른 사람과 눈 마주치지 않는 빈 곳을 봤다. 그때 왕십리를 지나자 밝은 빛이 쏟아지며 창밖에 풍경이 나타났다. 몇 사람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조용한 객실 안에 잔잔하게 흐르는 술렁임을 감각한다. 그때 깨달았다. 내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내 영혼은 여기가 아닌 도착할 곳에 이미 가 있었다. 몸과 영혼이 함께 머무르며,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게 지금을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쓰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 교문 옆에서 풍기는 빵 냄새, 잣나무 숲을 걷다 보면 가만히 들려오는 곤줄박이의 날갯짓 소리, 물보다 더 물처럼 깨끗한 물까치의 꼬리 빛깔 따위의 것들. 그리고 그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의 일렁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생각들. 주변의 것들을 느끼는 것, 그게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하지만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존재의 증거를 확인하길 미룬다. 그렇게 미루다 미루다 결국 느낌이 무엇인지, 어떻게 느끼는지조차 잊게 된다. 글 쓸 게 없다는 건 별거 아닌 일에 시선을 뺏긴 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지 않을까. 반대로 제대로 살아간다면, 내 주변의 스쳐가는 것들과 그것이 주는 느낌에 주목한다면 그게 곧 글이 되지 않을까.






글쓰기는 나의 한계를 더듬어 가는 과정

일상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삶이 풍부해졌고, 그만큼 글 쓸 거리가 많아졌다. 날마다 자기 전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의 느낌을 건져 올리는 데 재미를 붙였다. 사람과의 만남, 책과의 만남, 노래와의 만남 등 모든 만남이 전보다 더 짙어졌다. 기세를 몰아 학교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글에 관련된 여러 모임에 가입하면서 내 글의 영역을 점점 넓혀갔다. 하지만 요즘 들어 글이 잘 안 써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처럼 글을 쓰다가도 이게 정말 내 마음에서 건져 올린 글이 맞나 싶다. 어쩔 때는 내가 쓰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글이 나올 때도 있다. 내 글을 보여줄 곳이 늘어나면서 좀 더 멋진 글을 써야 한다는 욕심이 드는 모양이다. 문제는 욕심인 걸 알면서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일이 점점 괴로워졌다.



가장 글쓰기 싫어지는 이유는 나의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아마 나의 글이 뭔지도 잘 모르기에 생기는 일이 아닐까. '나의 글'은 무엇인가. '나의 글'은 다른 사람의 글과 무엇이 다른가. '나의 글'만이 가지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아직 내 글이란 게 없다. 지금의 나는 진정 내 속에서 솟아난 생각이나 느낌을 책이나 다른 사람이 했던 말 중에 어울리는 표현을 빌려서 쓰고 있는 단계다. 그럼 내가 추구하는 글의 모양이라도 정해볼까. 내가 추구하는 글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진짜 느꼈던 것, 생각했던 것을 쓰는 글. 적나라한 감정 표현을 통해 내 느낌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뭉뚱그려서 표현하지 않고, 비유적이지만 정확한 표현을 추구하는 글. 내 어린 제자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다시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멋진 글이 아니라 나의 글이 쓰고 싶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전하고 싶다. 초라하더라도 지금의 나와 내 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글을 쓰며 산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2년 동안 총 450개의 글을 썼다. 글이 많이 바뀐 만큼, 삶도 많이 바뀌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남한산에 오게 되었고, 삶을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교육에 대한 열정 가득한 선배님들을 만났고,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글에 담겨있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썼지만, 정작 글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나를 더듬는 과정이다. 때로는 나의 중심을, 때로는 나의 가장자리를 더듬어보기도 한다. 무심하기 쉬운 가장자리, 나의 한계를 나타내는 이곳이 사실 나의 모양을 정하는 기준임을 알게 되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가장자리를 솔직하게 더듬으며 나라는 세상이 조금씩 넓어졌음을 느낀다. 나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고, 그래서 앞으로도 글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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