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라는 적 - 라이언 홀리데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성정을 묘사하며 휘어진 목재라는 비유를 들었다. 칸트 또한 인간의 본성을 뒤틀린 목재와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뒤틀린 본능을 이야기한다. 그 뒤틀린 본능을 이 책의 저자는 '에고', '자아'라고 표현한다. 작가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이해가 쉽다. '에고' 혹은 '자아'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자기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세우고 싶은 마음, 초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타고난 교만함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생존 본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각종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환경 속에서 결국 나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스펙트럼의 선상에 놓여 과해도, 부족해도 모두 문제가 생긴다. 자기애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자기애가 과도해도 삶에 여러 문제를 낳는다. 결국은 자기 비하도 교만도 아닌 그대로의 '나', 참된 '나'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교만이 자기 비하의 옷을 입을 때가 있다. 오히려 사람은 진심으로 자신을 깎아내려 생각하기보다, 소중한 '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경우가 많다. 자기 비하도 결국 자기를 너무도 사랑한 결과로써 교만과 뿌리를 같이 한다. 과도한 자기애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린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인식이 부풀려질 때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자신감은 거만함으로, 단호함은 완고함으로, 자기 과신은 제멋대로의 행동으로 바뀐다. 교만은 현실에서의 세 가지 영향을 낳는다.
첫째, 배울 수 없게 한다. 배움은 기본적으로 '당신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의 부족함과 상대의 우월함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한, 배움은 일어날 수가 없다. 나의 부족함과 상대의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은 비굴한 자기 인식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숙함을 안고 산다. 상대에게 배울 점이 있는 것처럼 상대도 나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현실'일뿐이다. 하지만 교만은 이 현실을 가리고 나의 부족함과 상대의 우월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가장 극적인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는 지점은 실패를 마주할 때다. 실패는 객관적으로 나의 부족함을 알리는 신호다. 실패에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변화할 때, 성장이 일어난다. 하지만 교만은 실패의 원인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 찾도록 이끈다. 원인을 남에게서 찾는 것은 편하다. 소중한 내가 다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의 화살을 내가 아닌 남을 가리킨다면 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둘째,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게 한다. 교만이 차오른 사람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한다. 남'보다' 낫다는 사실만큼 나를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만은 나를 판단하는 가치 기준을 내가 아닌 남에게 넘긴다. 내가 얼마나 만족했느냐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그에게 중요해진다. 끝없는 저울질 속에 행복은 없다. 위에는 언제나 더 위가 있기 때문이다. 인정을 안이 아닌 밖에서 갈구하는 한 그 끝에선 나를 잃는다.
셋째, 무엇이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교만은 자기 방식에 고집하게 한다. 그것만이 진심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만에 찬 사람은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심지어는 삶에도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유해한 완벽주의가 나타나고, 과시가 목적인 의미 없는 전투가 수도 없이 벌어진다. 공항 직원과 싸우고 전화 상담원과 싸우고, AS 기사와 싸운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망상과 다르다. 우리는 날씨를 통제할 수 없고 시장을 통제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 삶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통제하고자 하는 교만과 부딪혀 수많은 갈등과 분노로 가득한 삶을 창조한다.
교만은 끊임없이 나를 남과 비교하고 남을 밟고 일어서는 기쁨을 느끼도록 부추긴다. 이 타고난 충동은 생존의 불안과 맞물려 현대 사회를 거대한 경기장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끝없는 경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딘가로 달려야 했다. 친구들을 제쳐서 앞서야 하기에 왜 달려야 하는지, 경주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을 새조차 없었다. 학교 시험, 대학 입시, 취업, 결혼 등의 경주 중에 만나는 각종 관문들은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의문을 잃었다. 어느새 어른이 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묻지 말고 일단 달리라고, 뒤쳐지면 넌 도태되는 거라고.
도대체 우리는 어떤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 어른들이 말한 대로, 또 우리가 말하는 대로, 공부를 못하면,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지 못하면, 승진을 못하면, 10억 자산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해 달린다'는 우리의 경주에는 생존을 변명으로 한 교만과 욕심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경주는 과도한 불안을 동력으로 지탱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과도한 불안이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다. 불안이 불안을 낳으며 마치 냉전 체제의 군비 경쟁처럼 서로의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 어리석은 경주 속에서 우리 삶을 빼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좋은 삶을 잘 살고 싶어 한다.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고, 위대한 일을 하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다음 것들 역시 인상적인 성취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만족하는 사람이 되는 것,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 등. 우리는 각자 독특한 생의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좋은 삶을 잘 사는 것의 기준은 나에게 있고 그 평가 또한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바깥의 기준에 도달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한다. 그게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에 유일한 정답이 있다면 맡은 바 일을 꾸준히, 정성껏 하는 것뿐이다. 거기에 자기만족과 행복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8
큰길을 돌아왔다. 그렇다면 인간의 뒤틀려버린, 도저히 반듯하게 필 수 없는 교만을 내려놓는 방법은 무엇일까. 교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니,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되겠다. 예수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한 것이나, 부처가 '자비(자애와 연민)'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은 사랑이다. 진심으로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본질적인 사랑을 품으면 자연스럽게 교만은 설 자리를 잃는다. 사랑은 제 잘난 맛에 떠드는 사람을 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으로 만든다. 무언가를 베풀 때 우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어야 한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열 때 나중에 사과를 따먹을 사람을 생각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숭고한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에 정해진 흐름에 맞게 꽃을 피우고, 사과를 여는 것이다.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라도 사과나무는 우쭐해하지 않는다. 그저 그에게 주어진 일을 행했을 뿐이다. 자연은 사랑을 행할 뿐 교만하지 않다.
우리 또한 자연처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한다. 거기에 어떠한 인정도, 칭찬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만약 나의 당연한 행위에 인정, 칭찬, 보상이 주어졌다면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곧,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