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이번 젠더살롱은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할까?>다.
뉴스를 틀었다 하면, '여전히 저런 사람이 있다고?' 싶다. 교육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 라는 생각을 매번 갱신한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과연 정말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바뀔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전 마블 영화에서 빌런으로 등장한 타노스는 "I'm inevitable"이라는 대사를 남기며, 정말 피할 수 없는 존재의 두려움을 제대로 보여줬다. 활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 변하지 않는 존재란 얼마나 공포인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활동을 해도,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그런 존재를 피하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막연한 낙관도, 자기연민만 남은 비관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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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할까?>
: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를 만나거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해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 그러니까 어디 소속되어서 정기적으로 출퇴근하거나 지시를 받고 일하지는 않으니까 일종의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데, 돈 받는 일만 하는 건 또 아니고… 성교육도 하고 성폭력예방교육도 하고… 글 쓰고 집회도 나가고 모임 운영도 하고… 설명이 길어질수록 상대의 동공이 흔들린다 싶으면 그냥 좋은 세상 만드는 힘든 일 한다고 이야기하고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린다.
단지 사람들이 낯설어해서만의 문제는 아니고 활동가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도 한몫한다. ‘프로불편러’라던가 ‘사회부적응자’, ‘시위꾼’ 등 어떻게 보면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로한 낙인은 역사도 유구한 ‘빨갱이’라는 멸칭에서부터 조금씩 변주를 거쳐 와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체명이라도 소개해야 할 때는 더 난처하다. 애당초 한 번에 이해되는 이름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는 상대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기 일쑤고 나는 그 해명의 지난함이 고단하여 때로 그대로 둔다.
난처한 순간은 갈등, 저항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피하려 할 때 발생한다. 최근 학교에서 교직원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은 강의가 끝나고 교육 담당자가 강의안에 있는 ‘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양성평등’으로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자신의 어떤 정치적 의견이나 종교적인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민원’을 염려하는 마음임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외에도 사전에 학교와 교육 관련하여 소통할 때 ‘민감한 사안’은 되도록 다루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흔하게 받는다. 그때마다 복잡한 심경이다. ‘성평등’, ‘성인지감수성’ 같은 말만 써도 민원 폭탄을 제기하며 문제시하는 경우가 상당하기에 이런 염려가 이해되지만, 정말 민원 없는 교육만으로 괜찮은걸까?
페미니스트는 자주 분위기를 깬다. 남들이 웃을 때, 그저 웃어넘기지 못하고 단어 하나가 신경 쓰여서 주저하다가 또 미움받기를 무릅쓰고 이야기해 분위기를 깨버린다. 혹자는 말한다.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냐고. 나도 알고 있다. 목이 쉬어라 이야기한들 어떤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견고한 세상은 흠집 하나 나지 않을지 모른다. ... 그럼에도 성차별의 순간마다,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분위기 깨는 한마디를 한다. 그게 세상까지 바꾸지는 못해도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되면 기어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만한 개구리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올챙이 때가 있었고, 누구도 페미니스트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활동이 인정투쟁의 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연민만 남은 비관에 잠식되지 않는 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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