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기의 시작

백수가 쓰는 일기, 백수기

by Nut Cracker

1.

요즘 같은 세상에 글이라니

백수생활을 알차게 꾸려보겠다는 기획과 포부는 좋았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무슨 글을, 어떻게 싸지를지 막막하다.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만 수백 가지가 떠오른다.


유튜버가 대세 장래희망으로 오른 마당에, 대체 누가 글을 쓰고 누가 글을 읽을까.

그 와중에 세상에 잘 쓴 글은 또 너무 많고 내 글은 흑역사를 생성하여 언제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지 모르는데.



2.

세상엔 또 재밌는 것 투성이라. 아직 다 못 깬 게임이 한 가득이고 못 본 영화, 드라마가 한 트럭에, 읽어야지 생각만 한 책들은 팔만대장경이다.


해야 할 일은 더 많다. 토익 점수는 만료됐고 나이는 차오른다. 소박한 경력이라도 쌓아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부담감이 매일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와중에 글이라니. 그것도 일기라니.



3.

딱 작년까지 참 알차게 살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뭐 비슷한 흉내를 냈고, 해외봉사와 인턴, 스타트업 캠퍼스를 전전하며 좋아하는 활동을 찾아다녔다. 나름 적성에 맞고 보람 있으며 제법 재미도 있는 일을 했다. 그리곤 조금씩 앓고 닳았다.


바빠서, 비타민D가 부족해서, 개인사 등등. 크고 작은 이유들이 있었겠으나 지금 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세상엔 천재지변처럼 가누지 못할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유난히 비에 잘 맞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젖는 건 일순간인데, 마르는 데는 한나절도 더 든다.

가만히 볕에서 걷기도 하고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온전히 24시간으로 살아냈다.



4.

저 바다 어딘가에는 쓰레기 섬이 있다던데,

한반도 열다섯 개를 이어 붙인 듯 크다던데,

망망대해를 외로이 떠다니다 마침내 마주한 쓰레기들이

섬을 이루고 산다는 이야기가 괜히 위로가 됐다.


보잘 것 없는 내 하루와 이야기도 모이면 섬이 될 수 있을까.

그럼 그 섬엔 풀도 좀 나고 꽃도 좀 필까.

내가 좋아하는 순간순간을, 드는 고민을 적어 섬을 띄워볼까 한다.

망망대해를 부유하던 이야기들이 어디엔가 정박하여 뿌리내릴 수 있도록,

먼 바다를 건너다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기약도, 주제도 없고 잘 쓸 자신은 더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백수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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