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와 문화생활 (ft. 블루램, 고래와 정민)

백수기 #1 (2019.01.19.)

by Nut Cracker

1. 백수와 문화생활


백수가 무슨 문화생활이야 싶겠지만, 백수야 말로 문화생활에 최적화 되어 있다.


그 언제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살아본 적 있던가?

6~8시간은 죽은 듯 잠에 할애하고 최소 8시간은 꼬박 생업에 상납하면

8시간이 남을 것 같지만 막상 출퇴근, 집안일, 뇌 부팅시간, 최소한의 휴식, 사회관계망 유지 등에 시간을 뺏기고 나면 내 시간은 통장 잔고마냥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만 문제인가. 의지를 낼 체력과 여력도 문제다. 불규칙한 일상 속에서 미래를 기약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잦은 포기와 실패를 이겨내고 또 다시 의지를 내기엔 내 멘탈이 가여워 생은 단출해져만 갔다. 그렇게 시작한 강제 미니멀리즘. 세상은 효율과 비효율, 0과 1의 세상으로 변해갔다.


백수가 되자마자. 효율과는 거리가 먼 일들로 하루를 채웠다.

누워 있다가 산책을 나갔고, 책을 좀 뒤적거리다 괜히 청소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해는 밝았다. 써도써도 넘치는 시간이 어색하고 즐거웠다. 효율과 비효율로 그려진 흑백의 삶을 채색하기에 백수는 너무 좋은 시간이다.


2. 블루램 그리고 고래와 정민


제일 먼저 즐긴 문화생활은 1월 5일 에반스라운지에서 열린 인디밴드 공연이었다. 세 가수가 나왔는데, 관심사는 마지막으로 나온 ‘블루램’이었다. 몽롱한 공연장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몽환적인 노래를 들려줬다. 특히 공연이 좋은 건, 음원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같은 노래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불러주기 때문이다. 첫 곡으로 ‘우주’를 들려주는데 음원보다 훨씬 힘 있고 인상 깊었다. 한 시간이 채 못 된 공연인지라 제일 좋아하는 ‘밤, 별’을 듣지 못한 게 유일한 한이다.

블루램.jpg 블루램(Blue Lamb)



두 번째 공연은 1월 10일 제비다방에서 열린 ‘고래와 정민’ 공연이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앞자리에 앉아 정말 손 뻗으면 뺨 맞을 자리에서 공연을 봤다. 힘없고 자칫 졸릴 법한 목소린데 매력이 뚝뚝 떨어졌다. 특히 ‘위로’와 ‘달’은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정말 우울해서 하나도 위로될 것 같지 않고 달님도 절레절레 할 것 같아 좋았다.

고래와 정민 2.jpg 고래와 정민


내 소박한 글재주로는 이 노래들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노래는 읽기보단 듣는 편이 좋으니 일단 들어보자.


< 블루램 - 밤, 별 >

https://youtu.be/f2hD_Q-9DTE

공연에선 듣지 못했던 노래 '밤, 별'


<고래와 정민 - 달>

https://youtu.be/G5U7bcmtvX4



3. 하고 싶은 일은 해야 돼. 안 그러면 병이 돼.


인디밴드 공연을 보기란 쉽지 않다. 치열한 티켓팅도, 비용 부담도 적지만 공연 자체가 드물다. 자칫 잘못하면 해체 혹은 활동 중지로 평생 유튜브 영상만 보며 눈물 흘려야 할 수도 있다. 유튜브 영상마저 없으면 답도 없다. 음원을 들으며 다양한 변주를 상상한다.


겨우 공연엘 가도 내가 꼭 그리던 노랠 못 들을 수 있다. 좋아하는 노래가 개중에서도 비주류일 경우 공연장에선 잘 불러주지도 않는다. 더 최악은 기껏 우울한 노래를 만들어 놓고 공연 분위기에 들떠 신나게 부르는 경운데,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려고 들어간 영화가 DC일 때의 기분이랄까.


그래도 공연을 보러가는 건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서. 라기 보다 이 생산성도, 효율성도 없는 시간이 좋아서. 잘과 못의 세상에서 이것저것 재고 따질 기준 없이 그저 내 기분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몇 안 되니까. 남은 체력과 시간을 긁어모아 열심히 공연을 보러 다닌다.


백수 생활이 조금씩 색으로 물들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