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교육활동가의 편지
지난달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59호에 기고한 글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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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입니다! 다들 신년 계획 잘 세우고 계신가요? 저는 올해 꼭 한번 교육 현장에서 나눠보고 싶은 주제가 있어 벼르고 있는데요, 바로 ‘군대’와 ‘성평등’입니다. 서로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두 단어를 한 데 묶은 건, 성평등을 이야기할 때 맞닥뜨리는 많은 저항 중 가장 단골 소재가 바로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성평등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군대나 다녀오고 말해!”라는 히스테릭한 반응에 아예 논의조차 불가능해지는 경험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 자신과 주변 수많은 이들의, 나아가 교육에서 만나는 천진한 어린이·청소년이 아마 높은 확률로 겪게 될 ‘군대’라는 경험. 이 경험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믿기에 연초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 합니다.
“너는 군대 안 가잖아!”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성차별 문제를 얘기하던 여자 어린이에게 한 남자 어린이가 “너는 대신 군대 안 가잖아!”라며 쏘아붙였습니다. 이윽고 여성과 남성으로 편이 갈라져 서로가 더 심각한 차별의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논쟁이 펼쳐졌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었습니다. 대략 십 년 후에나 경험할 일인데도 목에 핏대를 세운 남자 어린이의 눈에 서린 억울함과 공포는 진심이었습니다. 네, 저도 그 공포에 공감합니다. 전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그 공포를 겪었거든요. 지금도 생생합니다. 유치원 수련회 가기 전날 인생 첫 외박의 두려움에 떨던 제게, 부모님은 “나중에 군대 가려면 수련회 씩씩하게 다녀와야지~”라며 구슬렸으나 어린 저는 부모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생 첫 외박의 공포에 군대에 대한 공포가 더해져 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둘러싼 양가적인 태도와 시선
군대 다녀온 남성이라면 누구나 시달린다는 재입대하는 꿈. 이제는 예비군도 끝났지만 여전한 악몽입니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하지만 누구도 이를 진지하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남자들끼리 모였다 하면 군대 이야기는 단골 술안주입니다. 대개 누가 제일 고생했나를 중심으로 불행 배틀이 펼쳐지며, 조금이라도 편했다는 기색을 보이면 “꿀 빨았네~”하며 놀리기 바쁩니다. 게임에서부터 TV 예능, 유튜브 등 군대를 다루는 미디어 콘텐츠는 늘 인기입니다. 시간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으며 비인격적인 대우까지 받았다며 투덜대는가 하면, 동시에 힘든 훈련으로 이름난 곳에서의 경력은 은근한 자부심이 됩니다. 혹여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하면 ‘신의 아들’이란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 집단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군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는 양가적입니다. 군대가 그저 하나의 공간과 경험을 넘어서 남성성의 상징이자 하나의 현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질문과 분노의 방향이 향해야 할 곳
남성성과 군대를 둘러싼 얘기는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니 다시 교육 현장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엔 고등학교의 어느 반입니다. 열 올리는 남성 교육 참여자를 가라앉히고 되물었습니다. “군대, 꼭 가야 할까요?” 많은 참여자, 특히 의외로 많은 남성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제 침탈의 역사, 남북 분단 상황, 자주국방의 중요성 등으로 참여자 대부분이 군대 필요성에는 동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남성 참여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만 군대에 가는 걸까요? 누가 그렇게 만든 걸까요?” 앞에서의 기세가 무색하게 머쓱해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남자들만 군대에 가게 된 까닭이 여성가족부 때문도, 어떤 여성 정치인이나 대통령 때문도, 하물며 옆에 앉은 여성 참여자 때문도 아님을요.
현 징병 제도는 남성이 신체적으로 우월하며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성별 고정관념에 기인한 ‘성차별’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곧 남성이 여성보다 더 차별받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성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더더욱 없지요. 오히려 징병 제도는 그만큼 성차별이 뿌리 깊고 만연하며, 우리 모두를 옥죄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묻고 제대로 분노해야 합니다. 이런 차별이 만들어진 원인은 무엇인가요? 이런 차별은 무엇을 보여주고 또 어떤 결과를 야기할까요? 막연했던 분노의 대상, 문제의 원인이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에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도록 질문과 분노의 방향을 바로 해야 합니다.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군대를 둘러싼 남성의 공포, 이 문제 역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성차별 문제와 더불어 이를 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징병제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이 군대에 가면 문제가 사라질까요? 최근 군대에서 발생한 여성 군인 대상 성차별·성폭력 문제만 살펴봐도 군대는 여성을 맞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고, 성평등으로 가는 길은 더더욱 멀어 보입니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교육 참여자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군 가산점 제도’를 이야기합니다. 1999년 이미 헌법재판소 재판부 전원이 해당 제도에 위헌을 선고하며 그 차별적 요소에 대해 지적한 바 있지만 여전히 미디어와 온라인에는 그 필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저는 군 가산점 제도를 반대합니다. 징병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장애인과 여성을 차별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애당초 이 제도가 프리랜서인 제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로 수혜를 입는 건 공무원이나 공기업 지망생, 혹은 군대 경력을 인정하는 사기업(대체로 대기업)에 지원하는 이들 뿐입니다. 자영업을 하거나, 군대 경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기업(대체로 중소기업)에 지원하거나, 저처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복무는 군대에서 했는데 취업할 때 그에 대한 대우를 받고, 복무 의지와 별개로 애초에 징병 대상이 되지 못한 까닭에 여성과 장애인이 차별을 받아야 하나요? 그건 정말 ‘공정’한가요?
그보단 군 생활을 하면서 제게 진짜 필요했던 것, 또 앞으로 군 생활을 하게 될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일지 곱씹어 봅니다. 저는 존중 받고 싶었습니다. 군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하거나 욕설을 듣거나 폭력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때같은 젊은이가 군대에서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 이제 정말 그만 듣고 싶습니다. 정당하게 대우해 주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휴가 나와서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일만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군 생활을 하며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에 불편함이 없을 때, 비로소 애국심이 더 생겨날 겁니다.
뭐라도 해야지
군대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하며 많은 군필자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D.P.>에는 “뭐라도 해야지”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젠 과거의 일이란 이유로 그간 힘들었던 기억과 여전히 변하지 않는 군대의 현실을 다 잊고 외면했던 제 자신에게 하는 소리 같아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웠습니다. 올해부터 더 많은 청소년, 청년과 만나 성평등의 관점에서 군대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만들겠다고요. 당장 대단한 대안이 나오지는 않더라도 성평등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이들 역시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이게 저의 올해 계획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세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