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엄마, 또다시 유산
예기치 않게 찾아온 아기의 태명은 아토미였다. 유난히 길었던 가을에 찾아왔고, 못난 엄마를 만났어도 튼튼히 자라주길 바랐다. 이직은 포기하기로 했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하여 적당한 시기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막연히 세웠던 가족계획이었다. 나름의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여태까지는 잘해왔고, 어쨌든 갖고자 했던 둘째가 생겼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고꾸라진 체력에 몸과 마음이 동시에 아파왔다. 언제까지 외벌이가 가능할지 두려움이 앞섰고, 모처럼 찾아온 이직의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놀라웠고 신기했던 마음이 점점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임신을 확인하게 되면 1주 혹은 2주 간격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 이번 검진 때는 아기집을, 그다음은 난황을 봐야 하고, 이어지는 검진에는 심장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가 임신을 자각했을 때에는 이미 아기가 뚝딱뚝딱 집을 지어놨었는데, 흐릿하게 난황도 보였다. 병원을 다녀오면 떠다니던 마음이 다시 자리를 잡곤 하여서, 자주 병원엘 갔다.
첫째 때는 바느질로 곰돌이 헌팅트로피를 만들었다. 아기방 스토퍼로 쓸 코알라 인형도 만들었다. 바느질은 늘 어려웠기에 땀을 쏟으며, 바늘에 자주 손을 내어주며 정성을 쏟았다. 둘째 땐 태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따금씩 배 위로 달려드는 지우를 안아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회사에 두 번째 임신소식을 알리는 데는 많은 고민이 동반되었다.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출산이 이 나라에 이바지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업무 대체자를 찾고, 일정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회사에게 나는 곤경의 대상이다.
그날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팀장님과의 면담이었다. 계획하지 않았다고, 원했던 게 아니라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슬피 울었다. 팀장님께서는 우는 나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셨다. 긴 퇴근길 끝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따뜻한 응원의 글과 한우 선물이 와있었다. 어떤 오해도 일으키지 않을, 나를 위한 메시지였다.
면담 때 흘린 눈물은 그간 쌓아온 감정이 여과할새 없이 그대로 터진 탓이었다. 나는 가을의 아기를 원치 않았나 보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조차 죄스러워 애써 감추고만 있었다. 엄마로서 가져야 할 무조건적인 책임감과 넘치는 사랑이, 나의 사랑스러운 지우에게, 날카로운 회사생활에, 벌어야 할 돈에, 그리고 반짝이며 탐이 나던 이직기회에 조금씩 고갈된 듯했다.
퇴근길 2호선 강남역을 향하던 15분여의 길에서 나는 늘 울었다. 머릿속의 실타래가 뭉쳐지다 단단히 엉켰다. 처음엔 눈물만 덩그러니 떨어졌는데, 강남역이 보일 때쯤엔 내 울음이 미안해 더 크게 울었다. 매일을.
주말이 되면 조금 나아졌다. 지우를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해가 반짝 뜨고, 걱정구름이 걷혔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다시 검진일이었다. 지난번 조금 의아해하시던 의사 선생님은 이번엔 굳은 표정을 하셨다.
- 아기집 크는 게 좀 더디네요.
첫째 때도, 첫째 전에 스쳐갔던 ‘라이’ 때도, 온화하지만 칼 같은 진단을 하셨던 분이다.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곧 최악을 예상했다. 며칠 가지 못해 다시 병원에 가게 되었다. 아토미의 심장이 힘겹게 뛰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우를 만나기 전, 같은 종류의 이별을 뼈저리게 겪어보았다. 수술대의 그 차가움은 아직 선하다. 몸이 힘든 시기는 어찌어찌 잘 흘려보냈지만, 수술 후에도 몇 번이나 무너졌다. 한강 위를 훤히 비추는 달을 보다 무너졌고, 겨울에 핀 들꽃을 보며 무너졌다. 그때 그 이별이다. 두 번째 이별은 한 번쯤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 다 내 탓이었다.
첫 번째 유산을 했을 때,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을 때, 우리 엄마가 그랬다. 모든 것은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다고. 그 말만 믿고 여러 밤을 보냈는데, 이별까지 돌아와 버렸다. 지우로 아물었던 마음에 다시 생채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