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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Jan 18. 2024

철없는 딸이 가정을 이루다


외동으로 자란 나는 형제자매가 북적이는 집들이 늘 부러웠다. 10대로 넘어가면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하는 외출과 여행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 두 명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어색한 기분이 싫었다. 하루 대부분을 친구들과 보내도 내 또래의 피붙이가 없다는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가져본 적 없는 형제에 대한 아쉬움은 자녀를 많이 갖고 싶다는 바람으로 변형되어,  중학교 때부터 나의 소망은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혹은 다니는 중간에) 결혼해서 아이를 셋 이상 낳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참 한 후에도 결혼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아홉수라는 스물아홉이 되면서부터 극도로 초조해지기 시작한 나는 결혼할 나이의 마지노선이라고 여겨온 서른 살이 되자 우울감에 빠져 ‘남들 다 하는 결혼을 나만 못한다’며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더 큰 위기가 오기 전 지금의 남편이 한없이 수렁 속으로 빠져들던 나를 건져내 환호와 박수로 가득한 결혼식장으로 옮겨 놓았다. (게다가 남편의 외모는 당시 내가 이상형으로 생각한 배우와 흡사했다, 내 눈에는!)




22세에 결혼하길 바랐던 소녀가 31세가 되어 면사포를 쓰던 날, 늦었지만 바라던 바를 이뤘다는 감격과 이상형과 결혼한다는 뿌듯함, 결혼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이인 30세를 넘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안도감까지, 온갖 긍정적 기분에 휩싸여 결혼식 내내 광대가 아프도록 싱글벙글 웃었다. 하나뿐인 딸을 둥지에서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정은 채 헤아릴 사이도 없이 동화 속 해피엔딩을 장식하는 기분에 취해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만끽하던 어느 날,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아빠를 만났다. 말주변 없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흔히 그러하듯 별 알맹이 없이 의례적인 안부를 묻는 대화가 간간히 오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빠가 갑자기 만면에 미소를 띠고 큰 소리로 얘기하셨다.


“아빠는 행복해.”


“응?”

“너도 결혼해서 잘 살고, 사위도 너무 좋고."


"우리도 잘 살아~”

갑자기 잘 살고 있다고 강조하는 아빠의 말이 어색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빠가 더욱 겸연쩍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말이야. 엄마아빠는 지금 아주 행복해.”


아빠의 말끝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격앙된 아빠의 목소리, 촉촉함이 스쳐 지나가는 아빠의 눈가를 보자 내 마음에도 갑자기 큰 물결이 일렁거렸다. 30년 넘게 고이고이 키운 하나뿐인 딸을 품에서 보내고 이제 두 분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실로 큰 변화고 충격이다. 딸의 새로운 출발을 온 힘을 다해 응원하는 마음 한 편에는 얼마나 큰 쓸쓸함이 도사리고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만들어 들떠 있는 딸을 지켜보는 뿌듯한 마음과 잘 살기를 바라는 만큼 또 걱정되는 마음, 아빠의 행복하다는 말에는 그 수많은 감정들이 켜켜이 배어있었다.


결혼 직전 철없게도 “나 시집가면 엄마아빠는 집 넓게 쓸 수 있어 좋겠다”며 웃던 나였다. 나이만 들었지 정신적으로는 전혀 성숙하지 못한 채 한 가정을 꾸린 나는, 어느새 내가 떠난 후 부모님의 보금자리에 감돌 텅 빈 공기를 가늠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리고 부모님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부모로서 사는 경험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는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우리의 찬란한 황홀육아'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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