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Feb 09. 2024

내 자식이 제일 소중하니까

내가 엄마가 되던 날,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되던 날

잦은 배뭉침에 경부길이까지 짧아 입원을 반복하며 조산 위험에 시달렸던 나는 출산예정일 2주를 남기고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출산휴가는 시작일보다 최소 한 달 전에 신청과 승인 절차를 마무리해야 해서 휴가 개시일자는 진작에 결정되었는데 계속 조산기가 있어 매일 조마조마했다. 아이가 휴가 시작일보다 먼저 태어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레 출근한 나날들이었다.


막상 출산휴가를 들어오니 그동안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당시 팀을 옮긴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출산휴가 90일만 쓰고 복직 예정이었는데 아이가 나오지 않으니 슬슬 초조해졌다.

조산이 예상되어 일찍 휴가를 신청했는데 이제는 아이가 늦게 나올까 봐 걱정을 하고 있으니 참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똥똥아, 엄마 안 보고 싶어? 이젠 나와야지~


아이의 태명은 똥똥이 었다. 옛 어르신들은 귀한 아이일수록 이름을 못나게 지어 액운을 피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똥을 하나도 아닌 둘을 넣어 지은 태명이었다. 태명에도 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건만, 뱃속 태아는 조산기로 사람 맘을 졸이게 하더니 이제는 출산 예정일이 넘었는데도 나올 기미가 없어 아이 상태를 체크하러 매일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친정에 와 출산 준비를 시작했던 터라 아이가 나오지 않자 함께 지내는 부모님도 매일같이 애가 타는 눈치였다. 내가 거꾸로 있어서 제왕절개를 해야 했던 엄마는 본인처럼 딸도 수술을 해야 하나 싶어서 더 안타까워하셨고, 아빠도 매일같이 내 상태를 물으며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한다더라', '많이 걷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등의 카더라 통신을 실어나르셨다.


아이가 나오지 않아 매일같이 파워워킹을 하던 시절

 

출산예정일을 일주일을 넘긴 날, 아기를 낳으면 고기 구워 먹는 집은 당분간 찾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부모님과 함께 친정 근처의 갈빗집을 찾았다. 맛있게 고기를 먹고 기운이 난 김에 잠깐 집에 들러 옷 정리도 하고 다시 친정으로 건너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멀쩡히 잠들었다가 새벽녘 갑자기 배가 아파 잠에서 깼는데 출혈이 있었다. 통증도 그렇지만 피가 보이니 덜컥 겁이 나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얼른 오라고 한다. 아무래도 아이가 나올 것 같아 겁이 나는 와중에도 출산할 준비를 철저히 한답시고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샤워까지 싹 하고 진작에 싸둔 출산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진통은 점점 심해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병원에 도착해 두려움 반 설렘 반의 마음을 안고 병실로 향했다. 그래 이제 드디어 아이를 만난다, 난 이제 엄마니까 진통은 견딜 수 있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상황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진통 주기에 비해 자궁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산기가 있어 입원했을 때조차 항상 느긋한 말투로 내게 "괜찮아요."를 연발했던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본 순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왜 이러지? 아이가 숨을 못 쉬어요!


청천벽력이었다.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의료기구들이 줄지어 마구 들어오고, 처음 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내 주변을 에워쌌다. 너무 두려워 나야말로 숨이 멈출 것 같은 순간, 주변의 의료진들 때문에 남편도 엄마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혼자 떨어진 것처럼 막막해지며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감에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000 환자 응급수술 들어가야 해요. X번 방  빨리 잡아주세요.


수많은 의료진이 여기저기 연락을 하며 동시에 나를 수술실로 옮겼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급히 실려가는 동안 의료진은 내게 마지막으로 언제 식사를 했는지 다급히 물었다.


"어... 병원 오기 직전에 밥 먹었어요..."

"지금 바로 전신마취 수술하셔야 해서 음식물이 넘어와 질식하실 수도 있어요."

"네?!"


그때 비로소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출산하려면 힘내야 한다고 밥 먹고 가겠다는 내게 엄마는 재빨리 한 상 가득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셨다. 엄마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시고 수술실로 실려가는 나를 따라오고 계셨다. 엄마의 정성 가득한 밥상 잘 얻어먹고 나온 딸이 갑자기 수술받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일까.


하지만 그 순간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제발...... 저는 죽어도 좋으니 이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종교도 없는 내가 진심으로 저 하늘의 전지전능한 누군가에게 빌고 또 빌었다. 제 목숨은 앗아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발 태어나는 이 아이만 무사하게 해 주세요. 저는 죽어도 괜찮아요. 제발, 제발요.


모성도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훈련해야 발달된다고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저 어미로서의 본능만 살아있는 상태였다. 나 따위는 어떻게 되든,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내 어미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품은 이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것. 내 새끼를 이 세상에 무사히 내어놓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언제 마취를 했는지도 몰랐는데, 정신이 다시 들자마자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인데도 무조건 그를 붙들고 "아기는요? 아기는 무사한가요?"를 외쳤다.


"네, 아기 건강해요. 괜찮아요."

간호사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세상과 처음 만난 아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모습

생각도 못했던 응급수술을 하는 바람에 이 세상에 나온 아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아니라 아이의 할머니인 우리 엄마였다.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엄마는 손주가 밖으로 나오던 그 순간 아기의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워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하셨다. 아이의 첫 순간을 한참 지나 사진으로만 봐야 했던 나는 못내 아쉬웠지만 나도 아이도 무사하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아이가 건강히 잘 태어난 것만으로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의 공포를 싹 잊어버렸는데, 엄마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출산 전날 함께 들렀던 그 고깃집을 다시는 가지 않을뿐더러, 차를 타고 오고 가다 그 집이 있는 근처만 지나가도 자칫 딸을 잃을 뻔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몸에 한기가 든다고 하셨다. 어미들에게는 타고나는 본능적 모성이 있는 걸까. 막 엄마가 되려 하는 사람도, 엄마로 수십 년을 살아온 여인도 다 본인 자식이 이토록 소중하고 애틋하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