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벚꽃 피는 시기가 오면 끊임없이 재생되며 가수 장범준에게 꼬박꼬박 저작권료를 안겨준다 하여 '벚꽃연금'으로 불리는 노래 '벚꽃엔딩'.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이렇게 완벽하게 봄의 시작을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했다. 경쾌하면서도 아련한 하모니카 선율에 담긴 담백하면서도 울림 있는 장범준의 목소리, 그야말로 '흩날리는 벚꽃잎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눈을 스르르 감고 미소 짓게 된다.
벚꽃엔딩 말고도 제목에 대놓고 봄을 박아둔 수많은 노래들이 해마다 봄이 오면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겼다 사라졌다. 때로는 오랜만에 찾아온 햇살처럼 따스한 음악이, 또 어떨 때는 유난히 짧게 왔다 예고 없이 가 버리는 봄날의 처연함을 표현한 곡들이 귓가에 머물다 떠나갔다.
그렇게 봄날의 노래들이 내 곁에 왔다가고, 다음 해에는 그중 일부의 곡들을 또 찾아들었지만 다시 듣지 않는 노래들도 많아졌다. 바깥은 봄이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황량한 겨울이라서, 따스한 봄노래로도 더 이상은 내 메마른 감정에 싹을 틔울 수가 없어서, 화사한 봄의 곡들은 자꾸만 내 음악 목록에서 사라져 가기만 했다.
그중에서 벚꽃엔딩은 몇 번이고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곡이다. 벚꽃 피는 계절만 오면 전 국민이 듣는 노래, 봄만 되면 온 세상에 장범준의 목소리가 벚꽃 잎보다 많이 흩날리는 통에 오죽하면 벚꽃 연금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곡. 이런 흔하디 흔한 곡을 나까지 편승해서 매년 듣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세상만사에 작가의 촉을 들이대고 남다른 시선과 감각을 가져야 하는데, 4월에 벚꽃엔딩을 듣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너무 평범하다고 자책하며 되도록 듣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매년 이맘 때면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뻔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벚꽃엔딩을 반복재생한다. 차창 안으로 따스한 봄 햇살이 가득 들어올 때면 남편에게 꼭 이 노래를 틀어달라 말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개천에 만들어진 벚꽃 길을 지날 때에도 흥얼거리고, 2년 전 하필 벚꽃이 가장 예쁘게 만발했을 때 코로나에 걸려 집에 갇혀있을 시기에도 벚꽃엔딩과 함께 했다.
뻔한 노래를 듣는 흔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곡을 들으면 그동안 매년 내 눈에 담았던 제각기 다른 벚꽃의 풍경들이 펼쳐져서 몇 분간 행복해지는 느낌이 너무 좋아 자꾸만 재생을 누르게 된다.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촬영 버튼을 몇 번이고 누르게 만드는 집 앞의 핑크빛 팝콘 꽃잎들이 눈앞에서 날리고, 유난히 지친 늦은 퇴근길 가로등 불빛을 품어 더 눈부시고 창백하게 빛나던 어느 봄날 밤의 벚꽃도 떠오른다.
이 노래가 나오기 훨씬 전,일본 도쿄로 여행 갔을 때 그 유명한 우에노 공원에서 벚꽃보다 사쿠라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은 벚꽃더미 아래에서 사진을 찍던 20대 초반의 어린 아가씨였던 내 모습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여의도 윤중로에 딱 한 번 가봤다가 인파에 밀려 사진 한 번 제대로 못 찍고 혼이 나간 채 돌아왔던 어리버리한 데이트도, 대학 시절 노천광장에 드리운 벚꽃 아래 맥주를 들이켰던 청춘의 봄날도 떠오른다.
이제는 설레는 것도 떨리는 것도, 기대를 갖는 일도 거의 없어져버린 팍팍한 40대의 마음에 이 뻔하디 뻔한 노래만이 가슴속에 살금살금 봄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단 4분이라도 마음에 봄을 지피고픈 이 처량한 여성은 본인 연금은 방치해 두고 오늘도 벚꽃연금에 기꺼이 기금을 적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