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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28. 2023

세상이 온통 미치거나 찢었거나

00이 오늘 완전 미쳤잖아!! 혼자 골을 몇 개를 넣었는지 몰라!
와~~ 미쳤어 미쳤어~~


최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중 옆 테이블의 대화가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식당이 떠나가라 '미쳤다'는 말을 반복한 남자의 옆자리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고, 그 테이블은 가족식사를 하는 듯했다. 남자가 몇 번이고 얘기한 '오늘 완전 미친' 사람은 바로 옆에 앉은 남자아이, 그의 아들이었다. 이어지는 다른 대화로 추정컨대 그 남자의 아들이 오늘 축구경기에서 꽤 좋은 모습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한껏 들뜬 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에게 아들의 활약상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중이었다.


축구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친 아들에 대한 기특함과 자랑스러움, 아버지의 순수한 기쁨은 모두 '미쳤어'로 시작해서 '미쳤어'로 마무리됐다. 그의 아들은 오늘 축구경기에서 '미쳤고', 만면에 미소 가득한 남자에게 끝까지 '미친' 아들이었다.


어찌하여 저 똘망똘망한 눈동자의 귀여운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몇 번이고 들어야 하는가.


국어사전에서 '미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I.

 1.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예문) 그녀는 전쟁 통에 어린 자식을 잃고는 끝내 미치고 말았다.


 2. (낮잡는 뜻으로)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다.


 3.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매우 괴로워하다.

    예문) 지겨워 미치겠다.


II.

1. 어떤 일에 지나칠 정도로 열중하다.

   예문) 그녀가 노래에 미친 것은 작년부터였다.


'미치다'라는 단어가 가진 복수의 의미들 그 어디에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다', '자랑스러운 행동을 하다'라는 뜻은 없다. 기본적으로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걸 나타내는 말이다.



하긴, 미쳤다는 표현을 본래의 뜻과 상관없이 여기저기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게 그날 식당의 그 아버지뿐인가. 요즘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에게는 언론에서도 '미모가 미쳤다'라고 표현하니까. 상식적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외모가 준수하다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는 있지만, 어쩌다가 '미쳤다'라는 단어가 세상의 온갖 기쁨, 멋짐, 아름다움, 뛰어난 재주 등을 두루두루 묘사할 수 있는 만능의 어휘로 등극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쳤다의 유사어로는 '찢었다'가 있다. 모 가수가 한 "무대를 찢어놓으셨다"라는 말이 CF에 인용된 후로 더욱 굳어진 이 표현은 이제 '멋지다', '감동적이다'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 된 듯하다.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멋진 공연을 본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와, 오늘 완전 찢었다."



얼마 전 버스를 타고 한강 위 다리를 건너는 중 유리창 너머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을 때도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와, 하늘 미쳤네."

"어, 진짜 찢었다."


이들의 짧은 대화 어디에도, 하늘의 색깔이 어떠했으며 그 풍경이 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저 미쳤고, 찢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행동을 묘사하는 단어가 오로지 '미쳤다'와 '찢었다'만 존재하는 이곳은 얼마나 좁디좁은 세계인가.




*제목 사진 : Unsplash의 Joshua Fu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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