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머리에 무쓰를 잔뜩 발라서 더듬이를 위로 한껏 치켜올렸다. (건축학 개론의 납득이나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 친구 머리모양을 떠올리면 되겠다.)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 얼굴의 반만 한 왕안경, 눈이 조그맣게 보이는 두꺼운 안경알, 앞머리가 얼굴 반만 하다. 두꺼운 안경알을 뚫고 나오려는 듯이 눈빛은 매섭다.
저거 머리모양 만드느라 무스 한통은 썼겠지? 그나저나 대단하네. 아침부터 저 머리모양 만들어서 고정시키려면 힘들었을 텐데. 뺀질거리는 스타일일 것 같다.
어쭈?그나저나 학생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네?
덩치도 쪼그마해서 교복이 커 보이는 그녀는 의자에 꼿꼿이 등을 붙이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한쪽손으로는 왕더듬이를 손가락에 끼워서 비비 꼬고 한쪽손으로는 책장을 넘기고 있다.
뭐야! 교실에서 잡지책을 저렇게 당당하게 읽고 있다고? 강심장이네. 담임 나타나면 쟤 때문에 괜히 우리가 야단맞는 거 아냐?
뭐지? 특이한 스타일이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특이한 스타일인데? 무슨 책을 저렇게 읽는 거야? 궁금한데? 또 괜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슬그머니 뒤로 돌아 그 친구의 옆을 지나가면서 잡지책의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맙소사! 수학 참고서??수학 참고서를 저 자세로 보고 있다고? 패션잡지책도 아니고 소설책도 만화책도 아니고 수학 참고서를?뭐야? 천재 아니면 또라이?
(그녀는 천재쪽이다. 수학을 눈으로 공부하고도 송중기랑 동문이니까 천재인 것 같다.)
딱 이게 첫인상이다. 충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더 충격적인 공부법?더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교실 뒤쪽이 시끌시끌하다. 그 친구의 무용담이 펼쳐지고 있다.
말해봐. 어땠는데? 샤론스톤 진짜 이뻤어? 그거 의자에 앉아서 다리 꼬는 거 진짜 큰 화면에서 보니까 어떻든?
와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들어갔어? 학생증 검사 안 했어? 진짜 좋았겠다. 진짜 멋지네.
안 잡던데? 내가 좀 성숙해 보였나 보지. 흐흐. 너네는 다음에 비디오 나오면 빌려봐 봐. 아저씨가 안 빌려 줄 수도 있겠다. 흐흐
원초적 본능!
청소년 관람불가로 개봉해서 우리는 한밤의 TV연예에서 늘 주요 장면만 보면서 궁금해하기만 했던 그것을 개봉관에서 그것도 고등학생이!! 고 3이!! 과감히 현장매표를 하고 검표원을 뚫고 들어가서 보고 온 것이다.(예매 이런것도 없고, 줄서서 기다려서 표를 끊고, 검표원 아저씨를 통과해야하는 난관을 뚫고 대담하게용감하게!!)
당대의 섹시스타 샤론스톤이 금빛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하얀색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꼬면서 담배를 물고불을 붙이는 그 장면... 너무너무 궁금했지만 요즘으로 따지면 중학생 관람가 정도였을 것 같은 그 영화를 보고 와서 완전 영웅이 되어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쟤는 날라리야!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달이 뜨고 해가 질 때,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 때 삶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보고 싶은 미현의 첫인상이다. 세상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된 그녀이다.
그런 이상한 첫인상의 그녀와 내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되었는지 우리의 처음이 어떠했는지 왜 우리가 아직도 우리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지금 이 순간 그녀와 내가 우리라는 것이 중요하겠지....
어디인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 주고, 손 잡아주고, 손 흔들어주었던 그녀,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그 길을 함께 걸어가 주었던 그녀, 가끔 외박 나가면 갈 곳 없는 나를 위해 기꺼이 자취방을 내어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 주던 다정한 그녀.
캐나다로 이민간지 20여년이 지났다.
다른 이민자들의 친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와서 장기체류하는 바람에 이제 좀 뜸하게 왔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내 친구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오라 해도 아무도 못 오는지...하면서 은퇴하면 꼭 외야한다고 툴툴버리는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