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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Apr 26. 2023

지영, 잠자는 치즈 공주, 화천의 봄

봄날의 햇살을 닮은 지혜로운 그녀 


"일어나라! 수업 끝났다."

"어? 그래?"

잠결에서도 그녀는 참 이쁘게 말을 한다.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끝났어?"

"쉬는 시간이야."

"쉬는 시간이야? 또 자야지. 수업 시작 전에 깨워"

"또 자? 그럼 수업시간에 잠 안 올 수도 있어"

"아니야. 계속 잘 수 있어. 걱정 마"


우리 지영이는 오늘도 잔다.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 침 튄다고 싫어하는 교탁 바로 앞자리 

교탁 앞자리는 치즈를 닮은 지영이가 젤 좋아하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아주 기술적으로 편안하게 잔다.

다들 싫어하는 자리라서 늦게 와도 자리가 늘 남아있다. 

고3 때 우리는 등교하는 순으로 맘에 드는 자리를 골라서 앉았는데 그 자리는 어느 순간 지영이의 고정석이 되었다. 미대 입시를 코앞에 두고 늘 피곤에 지쳐있던 친구에게 휴식을 선물했던 자리이다.

 

스머프처럼 귀는 크고 말랑하고, 치즈처럼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는다. 

나 잘 거야.... 이러면서... 정말로 사랑스러운 친구다.

미대 입시를 코앞에 두고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원으로 달려간다.

수업시간을 꼭 다 채워야 했던 그때, 실기평가 점수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그때, 그림만 계속 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수업일수는 채워야 하고 그림도 잘 그려야 하고, 미대 입시 준비가 만만하지 않다. 


"손 씻고 잤어?"

"어"

"근데 이게 뭐야? 솔직히 말해. 그냥 기절했지? 물로만 씻었지?"

"야. 몰라. 학교 온 게 장하지."

학원 수업 듣고 학원 과제하고 집 가면 새벽, 집 가서 학교 숙제하고 맨날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를 온다. 

분명히 손을 씻었을 텐데 손톱 끝을 물들인 물감은 잘 빠지지도 않는다. 


한동안은 수업시간에 졸린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보고 있는 모양으로 교탁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자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기에 교탁 바로 앞자리는 너무 좋다.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교실을 조금 멀리 바라보기 때문에 눈 바로 아래 있는 것은 놓치기 쉽다.

그걸 노리는 우리 치즈 공주는 진짜 똑똑했다. 

우유빛깔 뽀얀 피부와 짧게 자른 머리카락, 그 덕분에 더 작아 보이는 얼굴

그 작은 얼굴 위에 커다란 금테안경,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부드러운 미소

자다 일어나도 참 예뻤던 그녀!


그녀의 도시락에는 늘 노랗게 살짝 녹아내린 치즈가 숨겨져 있었다. 치즈를 밥에 넣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집에서 치즈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이야 치즈 종류가 너무나 많아서 마트에 가면 어떤 치즈를 살 까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사 먹어보는 재미가 있고, 음식마다 어울리는 치즈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노란 체다치즈밖에 없었는데 그걸 하얀 쌀밤과 섞어서 먹는 그 맛이 그다지 행복해지는 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지영이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영양보충을 시켜주고 싶었던 것이겠지? 항상 밥 사이에 치즈를 넣어서 도시락을 싸 주셨는데 그마저도 입맛이 없다고 다 먹지 못했던 그녀가 그렇게 조금만 먹고도 힘을 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긴 얇고 조그만 입술이 꼭 만화책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닮아서 그 조그만 입으로는 많이 먹는 것이 어울리지도 않을 것도 같았다.

(요즘은 근육이 빠져서 많이 먹어야 한다며 4끼를 먹는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 우리 이제 근육 빠지는 걸 걱정할 나이가 되었지... 하하하)


매일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가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책상 서랍에 만화책을 넣어두고 몰래 보며 입시의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먹고 자고 그림 그리고 언제 공부는 하냐 싶었지만 귀가 그녀는 자면서도 수업을 들었다. 똑똑한 친구였다. 


원하는 학과에 입학을 헀고, 학교는 부산에서 다녔지만 절대 부산에 머무를 수 없다며 서울에 있는 회사로만 입사원서를 넣어서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의지 덕분에 문화의 중심지 서울에서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하고 멋지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강원도 화천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를 면회 와서 선임 소대장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나를 아주 나쁜 후임 소대장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모르는 그날의 뒷 이야기... 화천의 봄이 된 그녀의 화사함... 그 추억 속으로 잠시 빠져본다.


나는 첫 직장생활을 강원도 화천에서 시작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버스는 정확히 9시에 끊어지고 가로등은 없어서 컴컴하고, 동네 슈퍼는 30분을 걸어가야 하고, 배달음식은 당연히 없었고, 인터넷도 없고, 그나마 핸드폰도 안테나를 세우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전화를 받아야 했던 그때, 전방에서 불쌍하게 살고 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가 미현이와 함께 면회를 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으로 3시간 버스를 타야 하는 길이었지만 불쌍한 친구 혼자 고독사 할까 봐 먼 길을 면회를 오기로 했단다.  맨날 칙칙한 남자들만 보다가 친구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에 한껏 들떠서 설레면서 출근을 한 토요일 아침!

날벼락! 이런 날벼락!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근무를 마친 후 근처 계곡에서 발 담그고 놀다가 같이 저녁을 먹자는 중대장님의 말씀... 

'저기요! 안 돼요! 오늘은 안 되는데요!'

오전 내내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점심때 즈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서울에서... 친구들이 온다고 해서... 저는... 죄송하지만....

 참석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 삽시간에 벌어진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임 소대장들이 너무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합석하면 되지! 뭐 그런 걸 걱정해?? 우리가 화천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사줄게!"

"중대장님,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친구들과 중대장님, 선임 소대장님들이 함께 있는 그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먼 길 귀한 시간을 내어 나를 방문한 그 친구들에게 중대장과 선임소대장과의 합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리를 만들게 된 나는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칙칙한 삶을 살아가던 그들은 꼭 그들을 면회 온 친구인양 온갖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대며 친한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역시 나의 훌륭한 친구들.. 대학생활과 직장생활로 허허실실 기술이 늘은 친구들은 허허실실 하면서 모두가 즐겁게 자리를 만들어갔고 그 이상한 자리는 결국 노래방까지 이어졌다. 완벽한 합석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실력 발휘 한번 해 보지 뭐! 준비됐지? 하하하"

난감해하는 나를 향해 쿨하게 한마디 던지는 멋진 친구들!  

강원도 화천! 척박한 땅에서 3개월에 한 번 2박 3일의 휴가만 주어졌던 그 시절!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들은 국군 위문열차의 연예인들보다 멋진 추억을 선물했다.


그녀들이 다녀간 화창한 봄날, 우리 선임소대장들의 마음이 더 환해졌던 모양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당시 미혼이었던 중대장, 선임소대장이 매일 같이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달라고 나를 쫓아다녔다. 남자친구 있다 했지만 키퍼 있다고 공이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넉살을 부렸고, 보기보다 성격이 안 좋다고 하면 성격은 맞추면 된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며, 밥을 사 주며 회유(협박)했지만 나는 꿋꿋이 버텼다. 나의 치즈공주를 이런 시커먼 남자들에게 소개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회유와 협박이 먹혀들지 않자 나는 아주 나쁜 후임 소대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켰으니까!!



부드러운 미소와 눈웃음이 매력적인 치즈공주는 신하균을 꼭 닮은 멋진 연하남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아빠의 짙은 눈썹과 눈매를 닮은 믿음직하고 멋진 아들, 엄마의 뽀얀 피부와 귀여운 눈을 닮은 예쁜 딸과 함께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살고 있다. 다니던 직장과 사업을 그만두고 바쁜 남편,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잘 경영하며 살고 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삶의 흔적을 남긴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눈에도 주름이 잡히고, 물감을 잔뜩 묻히던 손톱은 다른 색을 입었고, 마디마디 아픈 흔적들이 있어 바라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책을 읽고, 봉사를 하고, 이제는 운동도 한다.(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장한 일이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바쁘고 쉴 틈 없이 하루를 보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따사로워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현명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세상 보는 눈이 넓고, 사려 깊은 그녀는 만날 때마다 지혜로움과 따사로움을 선물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고 있지만 아주 세세하게 서로의 일상을 캐묻지 않는다. 매일 전화를 하지도 자주 만나지도 못한다. 3년, 4년 동안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시간들도 있다. 하지만 그 비어있는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 우리가 만나는 날은 선생님 몰래 잠자는 친구를 들키지 않게 지켜주는 마음처럼, 친구를 위해 신나게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는 마음처럼 매 순간 따뜻할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늘 미소 짓게 만드는 나의 치즈공주,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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