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야. 너무너무 오랜만이다. 5년 전쯤에 너의 늦은 결혼 소식을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연락이 뜸해져서 이제는 다시 연락하기가 멎적어졌다. 지금쯤은 아주 작은 아기의 아버지가 되어 있지 않을까?생각해 본다.
우리 참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전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 전역 후에 복학하고 취업하고 유학 가고 직장을 옮기고 결혼을 할 때까지 계속 소식을 전하며 살았으니 꽤나 오랫동안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온 것 같다.
이런저런 사정들로 전역 후에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너는 어쩐지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언젠가 결혼은 왜 안 하니?라는 질문에 아직까지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에 결혼은 우선순위가 좀 떨어져서요. 기타를 배우는 중이거든요. 기타 배우는 게 결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서요. 라고 너는 대답했었다.
솔직히 그 말이 엄청 충격이었어. 뭐 요즘이야 그런 이야기들이 워낙 언론에도 많이 나오고 결혼은 선택이란 말이 흔한 말이 되었지만 그 옛날 너의 말은 참 너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 생각이 들었거든..
하긴 너의 남다름이야 증명할 사건들이 많지만 전역 후 보내온 첫 편지는 가장 너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어.
기억나니??
오늘 편지 오는 날이다.
지난 2주 동안 말썽 안 피운 사람부터 나눠줄 거야.
그리고 또 한 번 강조하는데 부모님한테 연락해서 뭐 보내달라고 하지 마.
소포 확인해서 위화감 조장하는 물건들 나오면 다 돌려보낼 거야.
특히, 외제담배나 외제화장품 이런 거 안된다. 알지?
소대원들이 젤 기다리는 시간이다. 편지와 소포를 받는 날 우편 집중국에서 사단으로 배송되면 트럭을 타고 가서 우리 부대 편지와 소포를 수령해 온다. 내가 하는 일들 중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아주 정기적으로 편지와 소포가 오는 병사들도 있지만 아예 아무것도 오지 않는 병사들도 많다. 그런 것들도 괜한 긴장감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소포는 꼭 검사를 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대 생활 끼지 지배하면 안 되기 때문에 사제물품은 절대 반입 금지다.
오호! 오늘은 나에게도 편지가 왔다.
부모님, 남자친구가 아닌 전역한 나의 소대원에게서 편지가 왔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전역한 소대원의 편지다. 생각도 안 했던 일이라 너무 기쁘고 설레었다. 빨리 편지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후다닥 편지와 소포를 나누어주고 편지를 들고 나왔다. 하얀색 행정봉투에 정성스럽게 쓰인 손글씨 낯익은 필체가 보인다.
기쁜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는데 두세 번 접힌 이면지가 보인다. 편지지가 아니고 A4이면지이다.
아.. 나의 핑크빛 상상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얘는 무슨 이면지에다가 편지를 썼나? 잘못 보냈나?
이게 뭐야? 툴툴거리면서 편지를 다 읽고 나서야 이면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복학생의 첫 성적표였다.
ALL A+ 평점 4.5점에 4.5점을 받은 엄청난 성적표
누나! 저 복학해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제기 약속했죠? 꼭 좋은 성적 받겠다고? 그래서. 저 약속 지킨 거 꼭 보여주고 싶어서 성적표 출력해서 뒷면에 편지 쓰는 거예요.
에코는 인사계원이었다. 잘 키운 계원 하나 열 간부 안 부럽다. 그런 말이 있었다. 정말로 그 말이 딱 어울렸다. 나보다 딱 3살이 어렸던 정말로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친구였다. 자신의 능력을 너무 잘 알고 그것을 잘 발휘하는 친구였다. 군에 있으면서도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천주교 군종병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최전방 강원도 화천의 추위도 그 열정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에코도 전역이 다가오자 너무 불안해했다. 군에 있는 동안 뒤쳐진 것은 아닐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듯 나에게 다짐을 하곤 했다. 저 진짜 잘할 거예요. 해 낼 거예요. 할 수 있어요.
그걸 증명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기억나니?? 너는 항상 너를 증명해 보이는 것을 좋아했어. 너는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거야. 너의 긴 공부와 직업, 가정에서 너의 역할과 능력을 열정적으로 해내고 증명해 보이는데 최선을 다하며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차분히 챙기면서 그렇게 살았을 거야.
정말 다행인 건 그 과정을 네가 즐기고 있다는 거야. 참 다행이야.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까..
너를 생각하면 항상 그 성적표 편지가 생각이 나.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데 아마도 넌 제가 이런 일을 했었나요? 하하하 이렇게 웃을 것 같다.
너는 늘 빈틈없고 성실하고 늘 다음 발걸음을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너의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고 내게 큰 울림을 주었어.
우리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지만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네 삶의 태도를 지키며 너의 의지로 당당하게 너를 증명해 가며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