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장입니다.

2화. 스물두 살 너에게

by ATHA

이장니임!

오늘도 바쁘시네요?


오늘은 진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풀도 베야하고 약도 쳐야 하고 목수질도 해야 되고 태우다 다 만 쓰레기도 마저 태워야 하고 새벽 6시부터 하고 있는데 이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오늘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꼭 오늘 다 안 해도 되잖아. 더위 먹으면 안 되니까 천천히 쉬면서 해. 물은 꼭 담아다니고.

괜히 일 욕심부리지 말고, 너는 일당 백이니까 조심해야 해. 파이팅! 이따 아이스크림 사주께. 파이팅!!


상희가 픽 쓰러졌답니다. 더위 먹었나 봐요.


예???? 진짜로??


하던 일을 팽개치고 행정반으로 달려간다.


에이 바보 같은

지 아니면 할 사람 없을까 봐?

오늘 덥다고 천천히 하라고 했는데..


상희는 그런 친구였다.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해 놓겠습니다. 제가 뭐든 좀 잘합니다. 이것도 다 경험 아닙니까? 이런 거는 곱게 자라서 먹물만 빨다 온 애들은 못 합니다. 걔들 시키다가 숨통 터지느니 제가 후딱 해치우는 게 낫습니다. 후딱 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먹물 빨다 온 아이들이 펜 잡던 손으로 삽질하다 손 까져서 징징거리는 소리 듣기 싫다며 굳은살 잔뜩 박힌 손을 보여주며 남자 손이 이 정도는 돼야 믿음직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다.


먹물파와 비먹물파가 있다. 팽팽한 신경전이 늘 있고 사뭇 진지한 전운이 감돌기도 한다. 먹물들은 행정병, 비먹물들은 창고병을 하고 있다. 창고병들 주류는 비먹물이지만 행정병 선발이 안 된 먹물들이 종종 창고로 배치되기도 한다. 그런 애들은 비먹물 입장에선 아주 성가신 존재들이다. 힘도 못 쓰고, 삽질도 못하고 망치질도 못하고,유도리도 없고 깝깝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도 상희는 비먹물이지만 먹물들의 비애를 이해하려 애쓰는 편이었다. 불쌍한 녀석들이라 한다. 행정 했으면 잘했을 텐데 창고 와서 고생이라고...



행정반은 거의 빙하기 상태다. 불쌍한 행보관은 쪼그려 앉아 담배를 문 화석이 되었다. 착하고 순하고 사람 좋은데 재주는 없는 행정보급관은 주임원사에게 불려 가서 혼이 났을 것이다.


상희는 주임원사가 엄청 아끼는 병사이다. 손재주도 없고 싹싹한 맛도 없는 행정보급관을 대신해서 부대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오죽하면 새끼 행보관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그런 상희가 더위에 픽 쓰러졌으니 행보관은 일도 못하면서 애지중지하는 병사의 건강도 못 돌본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주임원사는 항상 행보관을 맘에 안 들어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건수를 만들었으니 아주 맘 놓고 목청 높여 야단쳤을 것이 분명하다. 애처로운 행보관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애꿎은 담배만 푹푹 피워대며 화석처럼 앉아 있다. 오늘 산 담배 한 갑의 수명은 저녁때가 되기 전에 그 명을 다할 것이다.


상희는 작고 아담한 체구의 여자아이 같은 이름과 달리 농촌에서 나고 자라서 무서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고 가끔 출몰하는 뱀 따위는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호기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진짜 위장을 안 해도 될 만큼 까무잡잡한 피부와 피부보다 더 새까만 눈썹, 그 눈썹 위에 돌출된 작은 점까지 있어 인상을 더 강하게 보이게 했다. 키는 165센티 정도에 덩치가 큰 편도 아니었지만

다부진 몸집이었다. 게다가 신의 손을 가졌다.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들고 상희의 손길이 닿고 나면 헌 물건도 고가구처럼 멋있게 변했다.


상희의 장래희망은 마을의 이장이 되는 것이다. 전역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영농 후계자가 되고 나중엔 이장이 되어 마을을 발전시키는 게 목표라 했다. 참 보기 드문 친구였다. 이미 농촌의 붕괴가 시작되던 시기였고 모두들 도시로 도시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시절이었다. 무슨 새마을 운동 하던 시절도 아닌데 상희는 나고 자라서 부모님 살고 계신 고향을 사랑했고 그곳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상희를 고까운 눈으로 보는 세력들도 있었다. 주임원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해서 이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화를 내는 법도 없고 불평을 늘어놓는 법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맡은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상희를 너무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배려하고 나의 능력을 조직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그런 탁월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이장이 되어서 마을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고 싶다는 확고한 목표까지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배움이 길어질수록 인생의 갈등은 더 심해지는 것인지 우리 부대의 먹물파들은 대부분 전역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인생을 설계하기가 어렵다는 매일매일 힘들다는 말을 더 많이 늘어놓는데 나이는 그냥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상각했는데 상희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단단한 바위돌처럼 굳건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상희는 그렇게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마을 이장이 되어서 작은 마을을 쓸고 닦고 가꾸고 있을 것 같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까짓 거 제가 후딱 하면 됩니다. 다 맡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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