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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Apr 15. 2023

은정, 쑥 털털이, 봄

내 시간을 만든 사람들


사람의 향기는 옷을 뚫고 나온다. 세월이 지나 그 옷이 남루해지거나 철갑옷을 입게 될지라도...

봄이 되면 그녀의 향기가 난다.

그녀의 웃음소리와 함께



쑥 털털이...

어린 쑥을 소금 설탕을 뿌린 쌀가루에 버무려서 살짝 쪄서 먹는 음식이다.

곱게 빻은 쌀가루와 아직 여린 쑥이 어우러진 식감이 아주 좋다. 쌀가루가 많이 묻어있지 않아서 쑥 고유의 모양이 살아있어야 하고 쑥이 익혀져서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와 투명한 초록빛이 쌀 옷을  뚫고 나와야 한다. 쌀 옷이 그렇게 부드럽게 입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기억 속 쑥 털털이는 은정이다.

대학 입학 후 학과 생활이 너무 재미없었던 나는 일찌감치 동아리 귀신이 되었다.

하교도 등교도 동아리방에서 하고 수업과 수업 간 시간이 빌 때도 동아리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자 동기가 있었지만 결이 달라서 늘 혼자 동아리방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항상 동기애를 뽐내던 백경시스터즈가 있었다. 1년 선배였던 그녀들은 많은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성격도 생긴 것도 학과도 다 다른 그녀들. 은정, 다혜, 승희로 이루어진 그녀들을 우리는 백경시스터즈라고 불렀다. 우리 연극부의 이름은 백경이었고, 백경극회로 불렀다.

그녀들은 극회의 전설로 남은 여성 트리오이다.


키 170센티의 큰 키에 주근깨가 귀엽게 있는 하얀 피부, 쌍꺼풀이 없는 매력적인 눈과 그린 것보다 더 예쁘게 자리 잡은 눈썹, 세련된 옷차림, 무엇이든 뚝딱뚝딱 너무 쉽게 해내는 천부적인 손재주를 가진 은정

작고 여린 몸과 귀여운 얼굴에서 한 똥 때리고 갈게 하는 걸걸한 아저씨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반전매력을 뽐내고, 파워댄스로 대학 행사무대를 누비고 다녔던 보이시한 매력의 승희

쌍꺼풀이 짙고 속눈썹이 길고 큰 눈, 끝은 부드럽게 둥글고 날은 오뚝하게 서 있는 복스러운 코,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갖추고, 풀메이크업 없이는 외출하지 않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묘한 매력을 가진 다혜


시스터즈는 나의 우상이었다.


생계형 가정환경에서 학교와 집 만 왔다 갔다 하고 여자형제나 사촌들도 없었던 나에게 그녀들의 옷차림, 말투, 경험들을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내가 살아온 것과는 너무나 달랐고, 지금도 다른 세상에 살고 있구나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충분히 멋있었고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들은 일 년에 2번 준비하는 극회 정기공연 준비에서 각자가 가진  특유의 재주를 잘 살려서 승희는 늘 주연배우를 꿰찼고, 은정은 무대장치, 의상을 다혜는 분장과 음향을 도맡아 하면서 선후배 기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극회의 꽃이자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즘말로 "존나 멋있었다." "개멋집"

고작 1살 차이인데 뛰어넘을 수 없는 재주를 가진 그녀들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좋았다. 질투를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은 아직은 넘어설 수 없는 그녀들의 환경을 부러워했지만

그래도 그녀들의 유쾌함과 거침없음, 밝음이 좋았다.

그녀들 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은정이다.

나와 동갑이었지만 대학선배로 만났기에 자연스럽게 언니가 되었다.

 은정은 정말 마성의 손과 입을 가졌다. 그녀의 손 끝과 혀 끝에서는 늘 마법이 일어났다.

가끔은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 해 봄, 처음 쑥털털이를 맛보았던 그 봄...

쑥 뜯으러 가자고 하기에 처음엔 그냥 해보는 소리인 줄 알았다. 대학캠퍼스에서 쑥을 뜯는다고? 지금?

그녀는 주섬주섬 비닐봉지와 커터칼, 목장갑을 챙기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가자'한다.

하.... 내가 지금 진짜 쑥을 뜯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구나...

그렇게 해서 따스한 봄날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는 그날 땡볕에 앉아 쑥을 뜯는 중노동이 시작되었다.

쑥을 뜯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쳐다보면서 어리고 여린 쑥을 찾아서 계속 헤매어야 한다. 쑥이 난 길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되돌아갈 길이 또 한참이 된다. 그렇게 학교 대운동장 주변을 쪼그리고 앉아서 꼬물꼬물거리며  한 시간 넘게 쑥을 뜯었다.


대체 학교에서 쑥을 뜯어서 무얼 하려고 그러는 건지...

사실 난 쑥을 뜯어본 적이 없다. 그날이 처음이었다. 엄마가 할머니댁에 가면 가끔 할머니랑 쑥을 뜯고 옆에서 구경을 한 일은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쑥을 뜯는 내내 쪼그려 앉은 다리는 저리고, 머리는 뜨겁고, 손은 느려서 언니가 한 봉지를 채우는 동안 나는 반도 못 채웠다. 채워지지 않은 봉지가 괜히 미안했다.


터덜터덜 속내는 티도 못 내고 동아리방 옆에 화장실에서 쑥을 씻고 다듬었다. 깨끗이 다듬지 않으면 잔소리 들을게 뻔했다. 아주 말끔히 흙을 씻어내고, 쑥을 따라온 풀들도 골라내고, 물기도 탈탈 털어내니 그제야 쑥이 제대로 보였다. 겉은 짙은 초록색- 이걸 초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건지 사실 쑥색은 그냥 쑥색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쑥색... 잎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색이 묘하게 다르다. 뒷부분은 필터링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뭔가 보송보송한 털이 있어서 색감이 더 이쁘다. 힘들긴 했지만 뭐 괜찮은 수확이었다.


쑥 털털이 먹어봤어? 내가 금방 만들어 줄게.. 저기 앉아서 공부하고 있어.

음...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쑥 털털이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고, 동아리 방에서 라면과 찌개를 끓여서 먹어본 적은 있지만 그런 걸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상상으로도 그려지지가 않았다. 어쨌든 선배언니가 공부하고 있으라고 하니 저~기 떨어져 앉아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양새를 하고선 뭘 하는지 살펴보았다.


원래 쌀가루로 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냥 밀가루로 하자. 그래도 맛있을 거야. 하더니 쑥을 살짝 데치고 밀가루에 소금과 설탕을 뿌리고 흔들더니 창고에서 찜할 때 쓰는 구멍이 송송 뚫린 스텐찜기를 가져 나와서 밀가루, 쑥, 밀가루 쑥, 켜켜이 쌓기 시작했다. 옆에서 끓고 있던 물 냄비 속에  넣고는 기다린다. 대학동아리방에 거창한 요리도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요리도구가 있는 것 자체가 학칙위반이었지만 우리는 배고픈 연극쟁이들이라 밖에서 밥 사 먹을 형편이 안되어 집에서 쌀이며 김치를 가져다가 동아리방에서 다 같이 밥을 해 먹었다. 한솥밥 먹는 식구랄까? 그래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도구들로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건 은정의 특출한 재주였다. 나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그런 재주...  


거짓말처럼  뚝딱뚝딱 진짜 쑥 털털이가 만들어졌다. 모락모락 하얀 연기사이로 향긋한 쑥내음이 코끝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너무 상쾌했다.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수증기가 걷히면서 드디어 쑥 털털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저렇게 생긴 음식이구나... 음... 음.... 맛있어 보이진 않는데...

다 됐다. 먹자... 먹어야 하는 거겠지? 처음으로 먹어보는 쑥 털털이라는 음식은 뭐랄까... 그냥 쑥풀 맛이었다.

한입, 두 입 먹을수록 쑥의 쌉싸름한 맛과 씹히는 식감이 느껴졌고 간이 잘 베인 밀가루가 적당히 쫄깃해서 자꾸 먹고 싶어 졌다.


어때? 맛있지? 봄에는 쑥 털털이 무조건 먹어야 해. 한 번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지!

이게 끝인 줄 알았지? 좀 기다려봐 더 놀라운 걸 보여줄게!

짜잔! 이게 뭐게? 진달래 꽃잎이야. 이제는 화전을 구울 거야. 신기하지?

무슨 할머니처럼 말을 하며 하하하 웃는다.


화전이라... 중학교 때 가정실습시간에 한번 만들어 본 기억이 있다. 생각보다 어렵다. 찹쌀가루를 물에 개어서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바닥이 살짝 익었을 때 자른 대추, 잣 등을 위에 얹어서 다시 뒤집어 살짝 익히면 끝!

그런데 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물 조절이 어렵고 동글동글하게 부쳐내는 것도 어렵다.


여기서 화전을 굽겠다는 은정의 말은..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내가 집에서 찹쌀가루를 가져왔거든 흐흐흐

달콤 쌉싸름한 쑥털털이 향기와 타닥 타탁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화전 그보다 더 향기로웠던  은정의 웃음소리가 극회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먹고살기에 바쁜 생계형 가정환경 덕에 봄이 오는지 겨울이 오는지 알아차릴 틈도 없고, 계절 따라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스무 살이 되어버렸던 나에게 봄에는 쑥을 뜯고 진달래 꽃을 따서 쑥 털털이를 만들고 화전을 구워서 한껏 즐겁게 웃으며 맛있게 먹고 봄을 즐기면 된다는 것을 알려준 동갑내기 언니 은정.


신기하지? 맛있지? 내가 원래 다 잘한다. 하하하하

주황생 백열등이 켜져 있어 늘 오후 6시 무렵 같았던 극회에 밝은 조명을 켜는 그녀의 웃음소리


후로 나는 한 번도 쑥털털이나 화전을 만들어 먹은 일은 없지만 쑥이 솟아나는 봄이 되면 또 어딘가에서 그 맑은 웃음과 시원스러운 손놀림으로 누군가에게 새로운 날을 선물하고 있을 그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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