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북쪽나라 여우이야기
세 마리의 여우가 신나게 노니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 같아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판화작가인 데지마 게이자부로 작가님의 북쪽나라 여우이야기.
"여우는 배가 고픕니다. 긴 겨울털도 소용없이,
얼어붙을 듯 춥고 추운 밤입니다.
토끼를 발견하고는 달리는 여우.
여우 그림자도 함께 달립니다.
그리고 신비의 숲에 도착한 여우.
그곳에 본 그리운 엄마의 상냥함.
여름꽃이 필 무렵에는 형제들과 온종일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고.
즐겁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여우"
- 책 내용 중에서 -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혼자 있는 여우.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기 멀리 보이는 한 마리 여우의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북쪽나라 여우이야기 수업 후, 두 개의 질문을 다시 나에게 해본다.
신비의 숲에서 엄마의 상냥함을 생각하던 여우처럼 무엇을 할 때 엄마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어린 시절.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이나 추억이 있나요?
엄마의 상냥함을 생각하며 즐거웠던 한때를 기억하고 싶지만
글쎄.. 나는 엄마의 상냥함이 생각나지 않는다.
단둘이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어도 엄마는 늘 바빴기에 후다닥 먹어야 했었고,
같이 여행을 다닌 적도 없었다.
딱 한번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지만 기력이 없던 엄마는 계속 짜증이었고,
산해진미를 차린 식당은 마음에 들지도 않았었다.
건강했더라면 어딜 가든 즐거웠을 텐데, 너무 늦은 여행이었다.
이렇듯 후회는 늘 목구멍에 막혀서 숨 쉬는 걸 방해하고 나를 힘들게 한다..
밥 준비를 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엄마가 해준 반찬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꿈에서라도 실컷 먹어보면 좋으련만..
바삭바삭한 해물부추전은 아무리 재현을 하려 해도 안되고,
참기름 폴폴 나는 김밥은 10년을 넘게 단무지를 두 개 넣지 않는 이상 맛있는 김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흐물흐물해서 먹기 싫었던 메기탕의 시원함이 생각나고,
오도독오도독 씹으면 뜨겁게 터지던 미더덕찜의 신선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명절이면 집에 가서 냉장고를 탈탈 털어와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명절 증후군에 빠져서 명절만 되면 우울함에 웃음기조차 빠져버린다.
엄마옆에 누워서 수다라도 떨면 나아지려나.. 해도 그럴 수 없으니 한숨만 나온다.
맞다. 엄마 생각은 무언가를 할 때가 아닌 시시때때로 가만히 있어도 생각이 난다.
한해 한해 엄마 나이가 되어가니 그립고 또 그립기만 하다.
어릴 적 나는 봄이면 쑥, 달래 캔다고 들판을 휘젓고 다녔고,
여름에는 바다에서 조개, 꽃게, 해삼, 소라를 잡기도 했고, 소꿉놀이도 했었다.
가을이면 고사리 손으로 호미 들고 일군 밭에서 수확을 하고,
겨울에는 키우는 염소에게 먹일 사철나무를 찾으러 산으로 돌아다녔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참 많은 걸 누리면서 자란 것 같다.
이런 나에게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은 단 하나의 장면은.
더운 여름날, 동네 아이들이 모두 바다에 갔다.
오빠가 윗옷을 벗으며 잘 지키고 있으라 하고 바다에 풍덩 하고 들어가서는
자그마한 바위섬에 헤엄쳐 가서 소라, 해삼을 잡아왔더랬다.
"옷 잘 지키고 있으라." 한마디에.
진. 짜.로. 옷을 가슴팍에 꽉 움켜쥐고 쪼그린 채로 앉아 오빠만 기다리던 장면.
그때의 날씨,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기억이 난다.
"바다에 살았으면서 왜 수영을 못해?"라고 지인들이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빠 옷 지키느라."라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댄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한 그림책 시간.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잘 들려준 것 같은 여우 이야기라고 한다.
아이는 힘들 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은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라고 했다.
여우에게 한마디 해볼까?
글쎄요. 이미 잘하고 있어요.
이미 잘하고 있으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북쪽나라 여우이야기는 엄마가 생각나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했다.
그리고 담백하게 말하는 아이에게서 나는 또 배운다.
가족들을 위해서 뭔가 거창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고, 근사한 요리를 하는 게 아닌
그저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 남편을 위해 반갑게 맞이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