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Sky Island] 달콤한 인생...

컴 박 투미!

by 최익석bomiromi

벗에게.


심하게 가위에 눌려 악몽을 꾸었습니다. 온몸을 마치 결박당한 듯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날카로운 칼로, 톱으로 사지가, 목이 절단되는 꿈이었죠. 꿈이 분명한데, 깨어나야겠는데, 도무지 깨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잘리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행히 눈을 뜰 수 있었는데 깨어 보니 덮고 자던 얇은 이불이 온몸에 칭칭 감겨 있었겠죠. 웬일인지 최근에 이런 류의 꿈이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던 마눌이 놀라 안방으로 건너와 외마디 잠꼬대를 해대는 저를 여러 차례 깨우기도 했었죠.(두해 전에 환갑을 훌렁 넘기고서도 여전히 심한 갱년기 증세로 고생하고 있는 그녀는 아이들 방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별일이군. 왜 자꾸 이런..?'


밤늦게 하드코어 누아르나 연쇄살인마 슬래셔 영화를 즐겨보는 것이 그 원인이라며 마눌은 그때마다 탓하지만 어제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간밤엔 절절하고 가슴 아린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 4,5화를 마눌과 함께 내리 보며 눈물을 찍어 내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말이죠. 갓등을 켜고 천정을 멀뚱멀뚱 바라보자니 갑자기 오래 전의 누아르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은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지운 감독, <달콤한 인생>, 2005)


이병헌(김선우 역)의 그 좋은 목소리로 낮게 깔렸던 유명한 내레이션입니다. 소생의 꿈은, 달콤했으나 이루어질 수 없어 슬펐던 선우의 꿈과는 전혀 다른 악몽입니다.


'거울에 비춰보면 내 얼굴이 어떤 모양일까.'

그러다가 곧바로 다른 영화 하나가 또 떠올랐습니다.


넌 두고두고 날 살려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네가 이긴 줄 알았지?
난 잃을 게 없거든...

(김지운 감독, <악마를 보았다), 2010)


'아쒸~~, 지금 이 대목에서 왜 또 이 영화가...'

싸이코패스 살인마 최민식(장경철 역)을 결국에는 가장 처절하게 처단하곤 결국 자신도 죽음에 이르는 또 다른 이병헌(수현 역)이 순식간에 눈앞에 지나갔습니다.


'복수는 차가울수록 지독하다.'

이 영화의 카피였죠.


두 영화 모두, 복수를 다뤘습니다.

두 영화의 두 주인공 모두, 공히 결국엔 파멸을 맞습니다.


'김지운 감독, 나쁘군...'

누아르와 잔혹 슬래셔를 자신의 장르로 구축한 김지운 감독. <놈놈놈>과 <밀정>에서도 독특한 자신의 미장센을 구축한 바 있다. 이병헌은 그의 페르소나 중 1인.

밤새 뒤척이며 뜬눈으로 지새우는 동안 어느새 날이 밝았습니다. 여명 속의 하늘은 잿빛입니다. 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강우량이면 강릉의 가뭄은 완전히 해갈되었을 것입니다. 눈앞의 조도(鳥島)는 해무 속에 가리어져 있습니다. 섬은 며칠 동안 어두운 하늘 밑에서 먼바다를, 그리고 육지를 함께 바라다보고 있는 중이죠. 소생도 한동안 멍하니 조도를, 바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며칠 전 방파제 위에서 바라본 Dark Sky Island, 조도. 오늘보다는 오히려 양호했다. 오늘은 집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념이 스쳐갑니다. 불현듯 얼마 전 로컬 FM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온 엔야(Enya)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Listen to the waves become
The blue voice of the sea
And they whisper as they touch the shore
Come back to me,
come back to me

Boat by boat upon the waves
All come to find the light
In the darkness of the sky above
Come back to me,
come back to me

......

(Enya, <Dark Sky Island> 부분)

https://youtu.be/lAX65y4f3eI?si=Z2cUE3xu037w4npO


그날도 짙은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프로그램의 PD가 기가 막히게 이 노래를 선곡했더랬습니다. 엔야는 오늘의 켈트 팝(Celtic pop)을 뉴에이지 월드뮤직으로 발전시킨 수훈갑 뮤지션이라죠. 시간과 자연을 몽환적, 종교적으로 따라서 신비롭게 그려내는 음악세계를 추구합니다.


'어두운 하늘 아래의 섬'이라니.

따~~ 아악 저 조도를 이름이었습니다.


어렵지 않은 영어이지만 굳이 우리말로 옮겨 놓자면 이렇습니다.


파도의 노래에 귀 기울이면
푸른 바다의 목소리가 되어
해안에 속삭이네
“내게 돌아오라, 내게 돌아오라”

배 하나, 또 배 하나 파도를 따라
모두 빛을 찾아 떠나가네
하늘 어둠 속을 지나며
“내게 돌아오라, 내게 돌아오라”


아일랜드 출신으로 게일어, 스카티시 영어를 함께 쓰는 엔야인지라 발음이 독특합니다. 'Come back to me'는 '컴 박 투 미'입니다. 발음을 들어보면 '컴 백' 보다는 '컴 박'이 내게 돌아오라는 호소로는 더 간절한 듯도 합니다. '컴 박, 컴 박...'


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잭 도슨 역)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사라져 간 후 판잣대기 위에서 구명정을 향해, 쉰 목소리로 미약하지만 사력을 다하는 케이트 윈슬렛(로즈 역)의 외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컴 백, 컴 백...."


엔야는 'come back' 다음에 다음의 후렴구를 노래에 삽입했습니다.


Capella
Auriga
Eta Carinae
Sagitta
Aquila
Alpha Centauri


모두 별자리 이름들입니다. 각 잡아 듣고 찾아보기 전엔 당연히 귀로는 물론 눈으로도 잘 들어오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사전을 뒤적여 몇 가지 이름을 확인합니다. 염소자리(Capella), 독수리자리(Aquila) 정도는 눈에 들어오는군요. 이들 별자리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의 길잡이입니다. 영혼이 돌아가야 할 천상의 고향으로 안내하는. "Come back.."이란 말은 언제 어느 때고, 누가 말하든 간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창 밖의 섬을 바라보며 상기해 낸 노래 하나가 간밤의 악몽을 모두 잊게 합니다. 동시에 어제 늦은 오후, 이레네 수녀와의 긴 통화도 다시금 떠오르게 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호소는 엔야보다도 몇십 배 더 간절했었습니다.

파티마 성모상 발아래 놓인 이레네 수녀의 꽃. 그녀가 꽃이름을뭐라 일러주셨는데 그만 잊었다. 내 정도 성심으로 뭘 어쩌자고.ㅠㅠ


멜론(Melon)에서 이어지는 엔야의 노래 중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
Echoes in rain
Drifting in waves
Long journey home
Never too late
Black as a crow
Night comes again
Everything flows
Here comes another new day
......

(Enya, <Echoes in Rain> 부분)

https://youtu.be/OWFc5mkABNo?si=kUJL5BOz0wcWpJFX


이번엔 빗속의 메아리를 노래합니다. 마치 오늘같이 비오는 날을 위해 만든 맞춤곡인 듯합니다.


빗방울 속 메아리,
물결 따라 흘러가네.
머나먼 귀향의 길,
늦음이란 건 없으리.
까마귀빛 어둠,
밤은 다시 찾아오고,
모든 것은 흘러간다 —
새로운 하루가 또다시 오네.


인생에 늦음이란 없다는군요. '까마귀 빛' 어둠 끝에는 새로운 하루가 또다시 오는 거구요. 후렴으로 넣은 것은 바로 이거죠.


Alleluia, alle alle alleluia
Alleluia, alleluia
Alleluia, alle alle alleluia
Alleluia, alleluia
Ah, ah, ah, ah, ah, ah, ah


기대대로군요. 분위기 상으로는 뭔가 반전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았죠.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됨은 기뻐 외칠 일입니다. 알렐루~~ 야!

비교적 근래의 모습일 엔야. 1961년 생이니 나와는 같이 늙어가는 중일 게다. 자신의 음악세계만큼이나 평온한 얼굴이다.

저녁엔 미쿡의 아이네들과 페이스톡을 해야겠습니다.

간밤에 악몽을 꾸었더라도 절대 우울해하거나 낙담하지 말 것을, 파도의 노래는 푸른 바다의 목소리가 되어 내게 들려질 것임을, 귀향길이 비록 멀고 밤은 까마귀처럼 캄캄하더라도 모든 것은 흘러 새로운 날이 올 것임을 믿.고.,


뚜. 벅. 뚜. 벅,

그리고 또

뚜. 벅. 뚜. 벅,

앞으로 나아갈 것을

아이들에게 도란도란, 조단조단 일러주어야겠습니다.


덧:

<달콤한 인생>의 초반부에는 이병헌의 목소리로 이런 내레이션도 흐르죠.


제자가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보고 묻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입니까, 아니면 바람입니까.

스승은 제자만 바라보면서 답합니다.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이라고.


그렇군요.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은 제 마음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헤일 메어리(Hail M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