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자작나무 숲길에서.

박찬욱과 이병헌의 그집.

by 최익석bomiromi

이 식당으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늘 그러했듯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필연 같은 우연이란 뜻이다.


"(A3 크기의 색도화지 위에 마커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쓰고 있는 여주인장에게)

계산할게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네~~!"

"(벽에 붙은 주인장의 포스트를 가리키며)

엊그제 유퀴즈 본방을 보았죠. 박 감독과 배우 이병헌이 강원도 촬영 중 식사했다는 곳이 이곳이군요. 배부르다던 박 감독이 자신을 알아본 주인장의 성의를 봐서 '묵사발'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던..."

"어머, 그러세요? 정작 저는 재방송을 봤어요...! 묵밥...ㅎㅎㅎㅎ"

"이병헌은 '묵사발'이라고 표현했었죠."

"맞아요, 자막은 '묵밥'으로 처리했지만..."

"박찬욱 감독이 제 대학 후배입니다. 아, 물론 그는 저를 모르지만. 언젠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죠. 그때 함께 찍었던 사진이 이 핸펀에 있습죠."

"(눈이 동그래지며) 어머머... 그러시군요.

<어쩔 수가 없다> 꼭 보세요. 아니, 이리 말씀 안 드려도 꼭 보실 것 같긴 하네요...."

"식당 주인장이 궁금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을 알아본 시골식당 주인 할머니라니...

역시나, 이병헌 배우 말대로 젊은 주인장이셨군요."

식당 안 벽 곳곳에는 주인장의 깨알 같은 멘트가 붙어있다. 메밀은 직접 농사짓고 면 또한 당일 소요량을 직접 제분한다. 내세우지 않아도 신뢰가 간다.

포만감에 배를 어루만지며 현관 로비에 붙어 있는 이런저런 포스트를 살펴보는데 주인장이 따라 나왔다.

"손님들 중에 이런 얘기를 해주신 분이 아무도 없었는데...., 고맙습니다. 할머니 때부터 홀에서 서빙해 왔어요. 지금은 남편이 주방을 맡았죠."

"(홀에서 부지런히 오가며 서빙 중인 중딩 정도의 소녀를 가리키며) 따님이신 모양이죠. 보기 좋습니다."

"딸 같은 조카예요. ㅎㅎ.... 아무쪼록 저희 식당 많이 알려주세요~~~!"

"아무렴요...."


아침에 집을 나서며 점심으로 '최대섭 김밥'을 사서 가자고 했었다. 속초 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한 숨어있는, 유니크한 김밥으로 유명한 맛집이다. 메뉴 중에 특히 멍게 김밥을 좋아한다. 테이크 아웃 전문. 정작 속초 원주민들은 잘 모른다. 마눌은 '자작나무 숲' 주변에도 식당이 여럿 있을 테니 그곳에서 점심을 하자고 했다. 누구 말씀이라고.


원대리 자작나무 숲 근처에는 식욕이 동하는 마땅한 식당이 마땅히 없었다. 마눌이 서치하여 찜해 놓고 간 식당은 쏘가리 매운탕 전문집이다. 산중에 웬 매운탕? 달리 찾아간 식당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펜션에 딸려 있다. 당연히 발길이 닿질 않는다.


"내가 그랬지비? 김밥이 정답이라고?"


오가다 그냥 눈에 띈 짬뽕 순두부집으로 향하다가 아무래도 막국수가 낫겠다 싶었다. '또 국수?'라며 툴툴대는 마눌을 억지로 이끌었다. 그랬는데? 이 집이 바로, 유퀴즈의 바로 그 집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사실, <유퀴즈>의 박찬욱/이병헌 코너는 같은 날,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강경화 대사 보기를 마치고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걸려들었었다. 이 원대리 막국수집 또한 '우연히' 걸려들었다. 이러한즉,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모두가 필연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Since 1978 ‘옛날 원대막국수’. 자작나무숲 입구에서 자동차로 2-3분 내려오는 작은 천변에 있다. 반찬은 직접 재배한 보기에도 건강한 야채를 사용한다.

자작나무 숲은 10월 중순 이후 단풍이 들 무렵, 그리고 한겨울이 제맛이란다. 나보다도 연배가 몇 해는 위임 직한, 교양 있는 화법과 억양, 적당한 저음의 톤을 지닌 점잖은 장년의 숲해설가 양반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한번 방문에는 만족하지 못할 거라면서, 가을과 겨울에 몇 차례의 추가 방문을 권하고 있다. 과연 그렇겠다. 저 하얗디 하얀 몸기둥의 자작나무(Birch)가 제 머리에 노랗고 빨간 잎들을 얹고 있는 광경이라니. 백설 속 하얀 나신들의 모습은 또 어떻겠고.

몸기둥 곳곳의 거뭇거뭇한 ‘상처’는 태양을 향해 오르는 자작의 생존 흔적이다. 가지를 스스로 쳐내면서 위로 뻗는다고. 숲해설가는 이를 다크서클이라 표현했다.

가평 베네스트 버치 코스 어느 홀에도 작으나마 버치 군락지가 있다.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져 제법 장관을 이룬다. 눈썰미가 낮은 탓에 가을철 라운딩 때의 버치숲을 기억하지 못한다. 눈 오는 겨울 경험은 없다.


서울집 단지 안에도 작은 자작나무 공원이 있다. 선큰에 자작나무 수십 그루를 심어 놓았는데 늘 위태위태해 보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숲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자작나무는 뿌리를 얕고 넓게 내린단다. 시베리아 툰드라 동토가 고향인 탓일 게다. 아파트 단지 콘크리트 바닥에서 그나마 서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용하기도 해라. 연간 수십 만의 방문객이 오가는 이 숲에서 자작나무는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얕은 뿌리 탓에 방문객들의 숱한 발걸음이 부담스럽기만 하단다. 따라서 안식일 또는 안식년은 필수라고.


되돌아 나오는 코스는 '달맞이 숲'을 택했다. 다른 코스보다 30여 분 더 소요되고 조금 더 가파르지만 더 하얀 몸을 지닌 자작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했다. 과연 그러했다.

달맞이 숲 내리막길 중간에서 만난 자작나무들. 멀리 보이는 능선들과 어우러져 평안해 보인다. 풍경 속 마눌은 하나의 점으로 찍힌다.

오랜만의 오르내림이 마눌에게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주차장을 불과 몇 백 미터를 남겨 놓고 길거리에서 몸을 반으로 접는다. 그렇지 않아도 허리가 아파 고생하고 있던 그녀다. 보도 위에 잠시 앉아있으라 이르고는 차를 몰고 내려왔다. 핸펀 만보계는 이미 1만 4 천보를 넘어섰다. 그것도 산길로. 완만한 산책길 수준이긴 하다만.

보기에도 완만한 길이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작은 계곡에도 물소리가 제접 울린다. 왕복 8 킬로미터 정도의 오르내림을 마눌은 용케 소화했다.

문 앞에 택배로 전해진 추석선물이 놓여있었다.

좋은 와인이니 아껴 두었다가 좋은 날 열어젖혀야 할 터다. 대신 가성비 좋은 코스트코 PB의 말벡을 깠다.

마눌은 또 술이냐며 눈을 흘긴다. 아무려나, 몸과 마음이 가벼운 오늘 같은 날은 가볍게 한잔 해야 하거늘.

마눌표 저녁. 하루 후 오늘 사진. 양양 5일장에서 득한 버섯과 더덕이 1등급 한우와 어우러졌다. 제법 그럴듯한 삶이다. 마눌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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