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끊임이 없거나 혹은 대를 이어서거나...

by 최익석bomiromi

폴 토마스 앤더슨(약칭 PTA)이 자신의 최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를 촬영한 시기는 2024년 상반기다. 약 6개월의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블록버스터 대작(제작비가 물경 1억 2천만 불이다.)을 찍었다는 것인데 물론 사전에 충분한 준비 시간은 가졌을 것이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끝없는 전쟁' 정도로 이해했는데 관람 후 되새겨보니 '대를 이어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이 더 정확하겠다.

사격 연습하는 엄마와 딸. 엄마의 뱃속에 딸이 들어있다. 대를 이은 전투(전쟁)를 암시. 오른쪽 스틸사진 속 뒷편에는 여러 명의 수녀들이 앉아 있다. 수녀원이 지하 ‘혁명‘ 기지다

영화의 원작은 토마스 핀천의 <바인랜드(Vineland)>(1990)다.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라고 국내 번역판(박인찬 역, 창비, 2016) 커버 안쪽 날개에 소개되어 있다. 올해 88세. 원작이 발표된 시기나 국내에 번역된 때, 그리고 영화가 제작된 기간 등을 감안하면 작금의 '트럼프 시대'와는 무관한 듯하다. 단지, 영화가 개봉된 시기가 미국은 지난 9월 26일, 한국은 10월 1일이니 현재 트럼프가 도발하여 펼쳐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계를 이미 30년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에 예견했다고나 할까.

(물론 원작 속 세상이 영화 속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는 읽어보아야 알 수 있겠다. 페이퍼백으로 주문해 두었다. 용감하게.)

영화 메인 포스터. 개봉일이 미쿡은 9.26일, 한국은 10.1일임이 하단에 표기됐다. 거의 동시개봉인 셈이다. 국내에 PTA의 팬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듯.

트럼프의 노골적 '백인우월주의'와 그와 관련한 정책은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반이민에 설령 이민(난민 포함)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가급적(mostly) '영어를 할 줄 아는 백인'만을 허용한다는 최근의 뉴욕타임스 보도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나 체류 상태가 의심스러운 외국인을 국가 안보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라고 보고 이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축출하고 있는 중이다.

2025년 10.15일자 뉴욕타임스 기사. 난민 수용을 주로 영어를 구사하는 백인에 한하는 것으로 대전환한다는 트럼프의 방침을 보도한다. 사진은 남아공에서 건너오는 백인가족.

영화는 이를 타깃이라도 한 듯 극극극우익의 인종주의자, 반이민주의자 그리고 이에 맞서는 극좌 혁명테러리스트들의 스토리를 액션과 스릴러,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섞어 160분이 넘는 장편으로 묘사했다.


영화 속 백인우월주의자(일체의 혼혈을 배격한다. 성관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의 비밀조직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Christmas Adventurer's Club)'은 1920년대의 실제 집단이었던 '미국 앵글로 색슨 클럽(Anglo-Saxon Clubs of America)'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반이민, 반혼혈(anti-miscegenation)을 내세운 극비 백인우월주의자 집단(secret white-supremacist society)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엘리트 고급 집단(영화 속에서는 정치인, 기업가, 군인)이 비밀리에 조직을 가동한다는 것도 그렇다. 차이점이 있다면 영화 속 집단은 군사화된 폭력적 조직을 지니고 있으며 성 니콜라스를 숭상하는 의식(자신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Hail Saint Nick!"이라고 인사한다.)등으로 영화적 과장이 있다는 것 정도다. 이들은 유대인도 배격하는 인종정화(racial purification)를 최종 목적으로 한다.


숀 펜(스티븐 록조 대령/총경? 역)은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이상성욕자(디나이얼 게이/Denial Gay로 추측되는 장면이 여럿 있다)이다. 그가 지휘하는 군대식 조직은 제복에 새겨져 있는 바로는 경찰(Police)이다. MKU(Mankind United)라고 불리는데 현실 속 ICE(미국 이민세관단속국)에 해당하는 듯하다. 숀 펜의 계급은 커널(Colonel)인데 우리말 자막은 '대령'이라고 표기했다. 구성원이 모두 군복을 입고 있고 동원되는 무기, 차량이나 헬리콥터(블랙호크, UH-60A)등을 감안하면 우리 눈엔 경찰이라기보다는 당연히 군인과 군대로 보인다. 아무튼, 이들 특수기동대는 시위대나 테러조직(The French 75)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데 TV 뉴스로 보는 ICE의 그것도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블랙호크(UH-60A)에서 내리는 록조 대령과 그 부대원들. 우측 병사의 등에는’ Police’ 라고 쓰여 있다. 복장은 중무장 군대의 그것이다. ’트럼프 군대‘와 닮았다.

복잡하고 따라서 복합적인 성격의 장르 영화다. 액션에 스릴러적 요소가 강하나 블랙코미디의 웃픈 장면이 영화 전편 곳곳에서 펼쳐진다. 웃고 싶으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봉준호와 박찬욱 표 영화가 갖고 있는 기발하고 절묘한 대사와 미장센이 내내 만발한다. 분절되어 들리는 영어 대사 속엔 어마무시한 비속어와 쌍욕이 난무하나 우리말 번역은 최대한 순화시켰다. 영어 원본 대본이 궁금해지는 대목.


개인적으로 대단히 인상 깊게 본 장면이 둘 있다.


하나.

디카프리오(펫 캘훈 역. 지하로 잠적한 후 가명은 밥Bob 퍼거슨)가 MKU의 추적을 피해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넘으며 도주하는 장면. 베니시오 델 토로(세르히오 생카를로스 역)의 도움으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 40대의 밥에 비해 보드를 타는 십 대의 라티노(주로 멕시칸 계 불법체류자들)들은 기가 막힌 리듬으로 옥상을 넘나 든다. 이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며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는데, 도피 장면의 긴장감 속 보게되는 절묘한 리듬감이다.


둘.

엄청난 굴곡의 사막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냉혹한 인종주의자 존 후게나커(팀 스미스 역)가 머스탱(물색해보니 GT500)을 타고 수갑에 양손이 묶인 '윌라 퍼거슨'(밥Bob의 딸)이 몰고 가는 차를 뒤쫓는다. 그 머스탱의 뒤를 밥이 또 뒤쫓는다. 윌라, 팀, 밥 세 사람 모두 각각의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모른다. 막연하나마 당연히 뒤쫓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서로 꼬리를 물며 쫓고 있다. 이들의 차량이 굴곡진 도로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한다. 황야 한가운데에서 곡선 운행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보드를 들고 옥상 위를 넘고 또 넘어가는 라티노 청년들의 리듬감과 겹친다. 당근,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쫓고 쫓기는 존재들 간의 인지와는 무관한.

세 명, 쫓기는 자와 쫓는 자들이 꼬리를 무는 황야의 아스팔트 도로. 오르내리는 고갯길에 차량 세 대가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옥상 탈주 신과 더불어 이 영화의 압권.

제각각 아카데미 상에 빛나는 3대 명우(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는 경쟁하듯 연기의 향연을 펼친다. 아시는가. 그중 손 펜은 아카데미 외에도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었다는 사실. 성격이 괴팍하고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혼관(여성관)을 갖고 있어서 그렇지 연기만큼은 이 영화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다. 자신이 디나이얼 게이임을 알아챈 테야나 테일러(퍼피디아 베벌리 힐스 역. 윌라의 엄마이자 충동적이며 자기애성 성격장애 혁명가)에게 섹슈얼 충동을 느끼며 성적 관계를 맺는다. 숀 펜은 이 게이 역을 연기하기 위해 타인은 흉내내기 어려운 묘한 걸음을 걷는다. 감독의 주문인지 아니면 원작에 그리 묘사되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본인의 애드립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기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명우들. 베니시오 델 토로는 푸에르토리코 산이다. <시카리오> 시리즈 열연으로 흔히 멕시칸으로 오해한다. 이 영화에서도 멕시칸 지하 활동가(혁명가)로 밥(Bob)을 돕는다.

덧:

. 머스탱 GT500을 타고 나타난 '팀 스미스'가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에는 '라코스테'의 악어 로고가 새겨져 있다. PPL인가 싶었는데 서치 해 보니 미국 백인들이 즐겨 입는 셔츠 브랜드가 라코스테란다. 몰랐던 사실. 영화 속 크리스마스 어드벤처스 클럽 멤버들의 스포츠는 골프로 묘사되었는데 라코스테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였다. 아무려나. 테니스나 골프나 모두 한때는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산탄총으로 보인다. 미스테리하게 도로 위에 나타난 팀이 록조 대령을 이 총으로 제거한다. 그리고는 자신도 윌라에게 허무하게(?) 제거된다. 왼쪽 가슴에 보이는 라코스테 로고.

. 영화는 기본적으로 IMAX 영화관 용으로 촬영했다. 화면이 압도적이다. 따라서 IMAX 영화관이 제격이다. 아니면 70밀리 대형스크린(이를테면, 롯데월드타워의 수퍼플렉스관)이라야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겠다. 아쉽게도 스케줄(월요일)이 맞지 않아 우리 부부는 월타 일반관에서 관람했다. 그래도 좋았다. 사운드가 워낙 빵빵한 영화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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