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ngking Express>(중경삼림)의 도시 홍콩
홍콩의 레전드 영화감독 왕가위가 빼어난 영상미의 무협영화 <동사서독>을 발표한 때는 1994년 9월(한국 개봉은 95년 11월)이다. 역시 홍콩의 전설적 무협지 작가인 ‘동양의 톨킨’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을 원작으로 한다. <사조영웅전>은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대 후반에 <소설 영웅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성의제, 필명 김일강), 출간(고려원)되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의 소설 장르는 연유를 전혀 알 수 없는 ‘대하역사장편소설’이었다. 당근, 저작권 이슈가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에 정식 판권 계약 없이 당당하게 서점 매대에 올랐다. 90년 대 초반 파나마 주재 시절, 본사 출장자가 선물로 가져다주었던 것(1부 6권)을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탓에 업무에 막대한 차질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후에 이 소설 영웅문은 전 3부작으로 완간되었는데 원 제목은 <사조영웅전> 외에 각각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이다.
영화 <동사서독>이 발표되던 싯점에는 주재지를 마이애미로 이동하여 근무 중이었다. 1996년 어느 때 즈음인가에 집 주변(Doral)의,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디오 대여점인 <블록버스터>에서 빌려다 보았는데 당시의 감동(정확히는 감각적 영상과 내레이션에 의한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의 정확한 줄거리, 대사는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가 된 지 오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작중 인물들의 이름 외엔 소설과 영화는 거의 다른 작품이었다는 것과 홍콩이 자랑하는 당대의 배우 5인방(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그리고 황야(사막)의 삭풍에 나부끼는 깃발 정도이다.
홍콩 여행을 위한 사전 학습 목적으로 이제껏 보질 못했던 <중경삼림>을 마침내, 출국 전 마눌과 함께 보았다. 역시 넷플릭스를 통해서다. 영어 제목은 <Chungking Express>. 2부작 옴니버스 형태로 영화의 촬영지이자 배경인 ‘중경(Chungking) 맨션‘(1부)과 편의점 이름 ’ 미드나잇 익스프레스‘(2부)에서 한 자씩 각각 따왔다고. 한때 출장으로 중경(충칭)을 다녀온 적이 있어 나름의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싶어 눈여겨보았으나 건물 이름 외에는 없는 듯했다. <화양연화>와 더불어 발표 이래 유명세가 지대했던 사유로 너절한 설명이나 감상평은 불요하다. 작품에 누만 된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포인트로 화제가 되었던 것이 제작 및 발표 시기였다. <동사서독>을 제작하던 중에 잠깐 짬을 내어 설렁설렁 만들어 낸 것이 <중경삼림>이었고 제작에 소요된 시간은 단 23일이었다는 거다. 발표도 <중경삼림>이 2달 정도 더 빠르다. <중경>이 1994년 9월, <동사>는 같은 해 11월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여 서치 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왕가위는 <중경>의 핵심 기능인 촬영, 편집, 음악, 미술 등에 <동사>의 그들 스태프를 그대로 유지했다. 제작사(택동) 및 배급사(블록 2 픽처스)도 동일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주연 배우 중에도 양조위, 임청하까지 동일하다는 것. 내막은 모르겠다만 기인 왕가위는 천재일 것만 같고 배우와 스태프들도 과연 자기 분야의 장인 또는 달인 (마스터) 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잡설이 길어졌는데 하고픈 얘기는 이거다. 마눌을 모시고 홍콩에 와 있다는 거다. 이제야. 양쪽 남반구 세상의 끝(Fin del Mundo)을 위시하여 숱한 동네를 돌아다니는 인생 여정을 걸어왔건만. 허긴, 옆집 일본도, 그것도 가족여행으로 도쿄에만, 첫걸음을 내디딘 지가 불과 몇 년 전이다. 전적으로 게으른 탓이다.
어설픈 홍콩 여행기 또한 끄적이는 것 자체가 활자 공해다. 그저 영화 속 인상에 깊이 남은 곳들을 찾아 눈으로 조용히 담아두며 스토리를 복기해봄이 즐거울 일이다. 맛집 투어의 호사는 마눌께 온전히 감사드릴 뿐이다.
덧.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두는 이 하나.
소호(SOHO) 지역에서 배회하는 중에 만난 귀인이 있다. 50대의 교민 전업주부. 영어 소통이 안 되는 현지인을 붙잡고 맛집 찾아 헤매는 양이 영락없는 코리안임을 알아 채린 그녀. 홍콩살이 8년 차라 했다. 삶의 피곤함이 살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는 중이라 했다. 그닥 터 잡고 살만한 곳은 아니나 여행하기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며 빠뜨려서는 안 될 몇몇 포인트를 족집게 마냥 일러준다. 스스럼없이 마눌을 언니, 나를 ‘아버님’이라 하다가 이내 ‘오빠’라고 고쳐 부른다. 무사여행을 빌며 총총히 사라져 간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십자가 성호를 그려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마눌의 눈길이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