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메르세데스 소사
벗에게.
오밤중.
이승열의 '세음행(세계음악기행)'(EBS FM) 재방송을 듣고 있습니다. 본방송은 낮시간(14:00~16:00) 대에 편성되어 있죠. 성탄절에 즈음하여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음악을 중심으로 선곡, 내보내고 있군요.
귀가 번쩍 뜨이는 노래 하나가 이승열의 입을 통해 소개됩니다. 노랫말을 우리말로 멋지게 번역하여 소개하는 코너죠. 오늘 소개되는 곡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가수이자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의 기수였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1935~2009)의 'La peregrinacion'(순례)라는 노래입니다. 내용인즉슨, 요셉(Jose, 호세)과 마리아가 출산(정확히는 호적 등록)을 위해 고향 나자렛을 떠나 멀리 베들레헴까지의 '순례' 여정을 읊고 있네요.
A la huella, a la huella
발자국을 따라, 그 발자국을 따라
Jose y Maria
요셉(호세)과 마리아가 (걷고 있네)
Por las pampas de hielo
얼어붙은 팜파스 평원을 가로질러
Cardos y ortigas
엉겅퀴와 쐐기풀 사이를 지나며
A la huella, a la huella
발자국을 따라, 그 발자국을 따라
(...)
설명이 불요한 '침묵하는 자들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는 이 고단한 순례의 여정을 자신의 깊고 장엄한 음색으로 노래합니다. 딱히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듣는 순간, 그녀의 모든 노래가 그렇듯이, 심쿵할 노래입니다. 이승열 특유의 느릿느릿하고 모방불가한 억양, 무심한 듯 툭툭 내던지는 화법과 어우러져 전해지는 가사 내용은 실로 눈물겹군요.
(...)
Cortando campo
거친 들판을 가로지르며
No hay cobijo ni fonda
쉴 곳도, 머무를 주막조차 없으니
Sigan andando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
(...)
Los peregrinos
순례자들이여
Prestame una esperanza
내게 희망 한 자락 빌려주오
Se mi camino
나의 길이 되어주오
갈릴리 지역 나자렛(Nazareth)에서 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Bethlehem)까지는 지금의 고속도로 기준으로도 약 160km에 이르는 먼 길이라고 합니다. 임신한 마리아와 요셉이 이 머나먼 길을 삭풍(성서학자들 연구로는 10월~11월 경)을 뚫고 지나기에 2000년 전 당시의 사막은 얼마나 삭막했겠으며 산악지형은 또 얼마나 험준했겠습니까. 그 고단한 여정은 노랫말에 '얼어붙은 팜파스, 엉겅퀴와 쐐기풀, 쉴 곳도 머무를 주막도 없는' 등등으로 절절히 스며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고통과 역경이 가져올 만도 한 절망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esperenza)'으로 극복하여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이를 노래의 마지막에 'Jose y Maria!'로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핑을 해서 확인해 보니 소사의 이 '순례'라는 곡은 아르헨티나 클래식 음악의 대부인 아리엘 라미레스(Ariel Ramirez, 1921~2010)의 대곡 <미사 크리올라(Misa Criolla)> 중 <나비다드 누에스트라(Navidad Nuestra)>(우리들의 크리스마스)에 수록된 곡의 일부입니다. 아리엘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 현대 음악의 거장이죠. 남미의 토속적 가락과 악기를 클래식 성가에 접목한 주인공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미사 전례문(통상문)을 라틴어 이외에 각국(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자 스페인어로 미사곡을 만든 것이 바로 <미사 크리올라>(1964)였습니다. '크리올라(Criolla)'는 '유럽 혈통으로서 남미에서 태어난 사람 또는 (남미의 색채가 짙게 배인) 그들의 문화'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한글 미사 전례문을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된 때도 1960년대 이후였다는 거죠. 국악 미사곡이 등장한 때는 1971년. 로마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한 엘리트 사제인 이문근 신부가 한국적 정서를 녹여 넣어 만든 미사곡을 혜화동 성당에서 초연한 것이 시초였다죠. ‘토착화 미사'의 한국적 실천입니다.
아무튼, 아리엘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의 민속 음악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은 물론 뉴욕의 카네기 홀 등 세계적인 클래식 전당에 올려놓았다죠. 메르세데스 소사와 같은 누에바 깐시온의 토대를 마련해 준 주역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메르세데스 소사가 그녀의 장중한 저음으로 노래한 <La peregrinacion>입니다. 이 오밤중에 듣고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군요.
우리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절대자를 환영합니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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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와 영상(그림)이 서로 호응하는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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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음질이 더 좋은 Only Sound만 즐길 수 있는 버전.
덧:
실증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비판하는 ‘베들레헴 호적 정리’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이 대목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적 픽션이라 할지라도 ’낮은 곳에 비천한 몸‘으로 지상에 온 메시아의 서사와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