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아포리즘

“인간은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by 최익석bomiromi

벗에게.


어제 둘째 네 부부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미국 휘닉스(Pheonix, AZ)로 돌아갔습니다. 어미와 아비와 함께 꿈결 같은 열흘을 속초에서 보냈지요. 지난해(2025) 연초에 이곳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치렀으니 꼭 1년 만에 머물다 다녀간 셈입니다.


열흘 동안 어미는 온 정성을 다해 새끼의 먹거리를 마련하여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애를 쓰더군요. 서울 집 앞마당, 이나라 최대의 장터에서 사 온 꽃게와 '일등급 투뿔 한우', 남해 굴 등으로 담그고 만든 간장게장, 스테이크, 굴밥 하며 새해 첫날 모녀와 사위, 장인이 모여 앉아 빚은 정통 고기만두의 떡만둣국, 육전, 시래기국밥, 오징어볶음 등등. 동네 맛집 투어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제한된 시간 탓에 무조건 '먹어줘야' 하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바지런히 돌아다녔겠지요.

엄마의 집밥들 중 일부. 어미의 정성이 그릇마다 온전히 담겨있다.

부모는 새끼가 먹는 것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른 법입니다. 어미는 속초중앙시장 단골집에서 종류별로 사 온 젓갈을 바리바리, 꽁꽁 빈틈없이 싸매 캐리어에 넣고서는 단단한 주의와 함께 딸을 떠나보냈습니다.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가끔이라도, 문득문득이라도 밥 한술 뜰 때마다 엄빠를 생각해주기만 해도 그저 감읍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생명공학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그리고 레지던트 의사로 각자의 길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묵묵히, 성실히 잘 걸어갈 것입니다.


성서의 욥기(The Book of Job)를 읽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시편(The Book of Psalms)과 더불어 고대 히브리 민중이 창작한 걸출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지닌, 시가(詩歌)입니다. B.C 7~5세기 사이에 쓰인 작자 미상의 작품이죠. 욥(Job)이란 이름은 셈족 계열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는데 원래의 의미는 적(敵, enemy)이라고 합니다.(The New American Bible, 1991)


현대의 한국어 사용자가 욥기의 문학적 수월성을 평가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이 기록의 위대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유로는 '무죄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이 있고 끈질긴 질문에 있습니다.


욥은 '흠 없고blameless 올곧으며upright 하느님을 경외하고feared God 악을 멀리하는avoided evil'(욥 1, 1) 동방 우즈(Uz) 지방의 부유한 족장(chieftain)이었으나 신과 사탄의 거래에 의한 시험에 들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일곱 아들과 딸 셋을 한순간에 잃습니다. 참척(慘慽)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여의는 고통인 천붕(天崩)은 이에 비할 바 아닙니다. 게다가 엄청난 재산 또한 재앙 끝에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 모든 비극을 받아들이고는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욥 1, 22) 않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 21)

이어지는 시험에서 오는 고통도 끔찍합니다. 사탄은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치고'(욥 2, 7), 이런 끝에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지내는' 신세가 됩니다.(욥 2, 8)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라고 절규하나 욥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라며 자신의 입술로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욥 9-10)


정작 욥을 꼭지가 돌게(?)하는 것은 위로차 방문하는 친구 3인(+1인, 막내인 청년 엘리후)과의 대화 및 담론(Speech)입니다. 욥을 위로한다며 한다는 이들의 말의 요지는 첫째, 하늘은 이유 없이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는다. 둘째, 비록 죄인이라도 하늘에 복종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는 것이었죠. 인과론에 따른 응징론이며 가장 천박한 수준의 현대 기독론에 다름 아닌 구원론이죠. 열받은 욥은 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무고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하느님과 끝까지 맞짱을 뜨겠다고 합니다. 직무유기인 신으로부터 자신의 질문에 대해 직접 답을 들어야겠다는 겁니다. 질문 하나하나는 심오합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어떻게든 그 의미를 찾으려는 질문을 던지죠.


마침내 욥의 눈앞에 등장한 신은 욥의 '위대하고 심오한'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질문을 '폭풍 속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냅니다. 욥을 꾸짖으며 던지는 질문이 갖고 있는 성서에서 무려 다섯 페이지(챕터로는 38장-41장)에 달하는군요. 여기서 신은 욥(인간)과 시시비비를 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질문하는 주체이지 답하는 주체는 더더욱 아닙니다.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습니다. '알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거듭 강조하며 마침내 욥(인간)의 굴복을 얻어냅니다. 심오하기로 따진다면 차라리 그간 던진 욥의 질문이 더 심오한 듯도 한데 말입니다. 욥이 신에게 굴복한 유일한 사유는 말로만 듣던 신을 '눈앞에서 보고 들었으니' 이로써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 42, 3-6)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결과로, 이유도 알 수 없이,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허무는 없습니다. 그러느니,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섭리가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싶어 찾은 것이 신일 겁니다. 무의미한 삶을, 인생을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신형철)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A man can be distroyed, but not defeated)"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3일간의 사투 끝에 잡은 대어를 끌고 오다 이번에는 상어 떼와 싸우게 되는 노인(산티아고)의 독백으로 유명한 말이죠. 도덕주의적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한 헤밍웨이는 1차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후 가톨릭 신부에게서 종부성사를 받으며 위안을 경험합니다. 이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배우자와의 결혼(재혼)을 위해 가톨릭에 귀의(1927)하나 스스로를 "부패한 가톨릭 신자(a rotten Catholic)"라고 칭한 것을 보아 아마도 냉담(Inactive worship)을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나무위키) <노인과 바다>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신성시한 실존주의적 허무주의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가 욥기를 어떻게 읽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가톨릭에서는 대죄인 자살(엽총)로 생을 마감(1961)한 그였기에 더더욱.


척수암으로 투병 중 사망(2009)한 영문학자 장영희(마리아) 교수(서강대)도 파괴되었을지언정 결코 패배하지 않은 불굴의 인간이었습니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된 그녀는 부친 장왕록 교수(서울대 영문학, 1994년 작고)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서울사대부중. 고를 거쳐 서강대 영문학과에 진학합니다. 서울사대부중에는 서울대 교수였던 아빠의 신분 덕분으로, 서강대는 당시 학과장이었던 미국인 신부의 배려("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로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당시에는 장애자에게는 중고등 입시 및 대학 입시에 응시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았다는군요.(나무위키) 아무튼 그녀는 '패배되지 않는' 영혼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 후 모교인 서강대에서 후학을 양성합니다. 그러던 중 척수암이 발병, 5년 여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휴먼 스토리죠.


미국으로 돌아가는 둘째에게 책장에 꽂혀있던 장영희 교수의 책 한 권을 들려주었습니다. 결코 패배하지 않을 삶을, 인생을, 아이가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산티아고 노인의 혼잣말을 냉혹한 인생을 겪어낼 수 있는 아포리즘으로 삼아주기를 함께 바라면서.

장영희 교수의 몇 권의 책들. 2002년, 아빠따라 멕시코로 가게되는 초딩 조카(첫째)에게 고모가 선물로 준 책이 그중 하나다. 우연히 둘째에게 대이어 전해진 셈이다.

덧:

. 장영희 교수의 책이 둘째에게 전달되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묘합니다. 페북에서 우연히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발견합니다. 신형철 해제. 바로 구입했겠죠. 2014년 12월 말 주성철 기자의 영화 강의를 듣던 중 그가 추천한 <정확한 사람의 실험>을 읽고는 익히 신형철 교수의 필력을 알게 되었죠. 내친김에 속초시립도서관에서 그의 다른 저서 <인생의 역사>를 대출했는데 글 속에서 <욥기>와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그속의 고통에 대한 비평을 읽게 됩니다. 그러다가 장영희 교수까지. 장 교수의 글속에 헤밍웨이가 있었습니다.

신형철 교수의 저작(해제)들. 문장도 문장이지만 비평의 깊이와 예리함이 감탄을 자아낸다.

. 신에 대한 욥(Job)의 굴복은 패배는 아닐 것입니다. 전지전능(omniscient and almighty)한 신에게의 굴복은 회개(repentance), 귀의(turn to God) 등과 동의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떠나던 날인 그제(날 바뀌어) 아침(왼쪽)과 다음날인 어제 아침. 하룻 사이에 날씨가 급변했다. 이 새벽에는 강풍이 요란하다. 날씨가 험해지기 전에 떠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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