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감의 시간
그저
시간이 지나가야 한다.
생각해보려 해도 소용없고,
의미를 붙여보려 해도
몸이 먼저 거부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는
다른 답이 없다.
말로는 안 되고,
다른 무엇으로도 안 되고,
그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야 한다.
이 시간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다.
견뎌야 할 필요도 없고,
잘 이겨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살아 있는 채로
지나가는 시간이다.
아픔이 옆에 있어도
같이 숨 쉬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드는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가장 많은 일들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나는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다만,
덜 아프게 만든다.
매일 찌르던 통증이
어느 날부터는
눌리는 느낌으로 바뀌고,
계속 떠오르던 장면이
어느 순간
잠시 잊히는 틈을 만들고,
아물지 않던 상처가
언젠가부터
덜 신경 쓰이는 자리에 놓인다.
그건 해결이 아니라
무뎌짐이고,
그 무뎌짐은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잊혀짐은
배신이 아니다.
묻혀짐은
도망이 아니다.
그건
마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이다.
어떤 기억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지키기 위해
잠시 땅속으로 내려간다.
지층처럼.
이 시간에는
기다림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질 거라는 확신도 없고,
언젠가 의미가 생길 거라는 약속도 없다.
그저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이 오고,
그 다음 날이 또 지나간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아,
어제보다는 덜 아프구나.”
그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간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존중하고 싶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것도 해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어도 되는 시간.
이 시간 덕분에
우리는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