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이 느린 남매 육아일지

율이의 포도주스 사건

by 봄울

율이는 아직 말을 하지 않는 만 여섯 살 여자아이다.

어제는 시어머니께서 조그맣게 농사하신 깨를 터는 날이었다.
나는 둘째를 시어머니 방에 잠깐 두고, 어머니가 깨를 터시는 곳으로 갔다.
넓게 펼쳐진 큰 비닐천 위에 고소한 깨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내년에도 사용하려면 비닐천을 정리해야 했다.


“너 있을 때 접어야겠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농사엔 문외한이다.
밭일을 돕는 법도, 무엇을 언제 심고 거둬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농촌에 산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그저 깨를 턴 흔적을 빗자루로 쓸며 정리하는 정도로 도와드렸다.

그리고 시어머니 방에 들어가던 순간—


오 마이 갓.


율이는 응가를 하고 물을 내리지 않은 채 거실을 지나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전날 남편이 사온 포도주스를 화장실에서 마시다가 엎질렀는지,
보라색 포도주스가 화장실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도 군데군데 보라색 흔적이 이어졌다.

방 안에는 아직 뜯지 않은 포도주스 세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율이는 응가 뒤처리를 하지 못한 채 태블릿을 보고 있었고,
엉덩이는 뒤로 쭉 뺀 채였다.


시어머니께서 오시기 전에 얼른 수습해야 했다.

먼저 둘째의 엉덩이를 닦이고, 화장실 물을 내렸다.
샤워기로 포도주스 자국을 씻어내고,
걸레로 거실 바닥을 닦았다.
방에 남은 흔적을 닦아내고, 보이지 않는 곳에 포도주스들을 숨겼다.


‘내 잘못이지. 율이를 혼자 두었으니….’


둘째는 혼자 두면 꼭 무언가 사고를 친다.
시어머니가 말려둔 꽃잎을 손으로 부수거나,
씻어둔 깨를 베란다에 뿌려놓거나,
냉장고에서 들기름을 꺼내 마시고 방에 뿌리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저지레는 닦고 치우면 끝이니 괜찮다.


문제는 뭐든 코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기였다.
이름하여 구강기가 아닌 '비강기'

클레이를 코에 넣어 병원에 간 적도 있다.
그 일 이후로 집 안의 모든 클레이와 작은 블럭들은 사라졌다.
첫째 생일 선물로 작은 블럭 군함을 사줬을 때도
“율이가 코에 넣으면 어떡해”라며 남편과 다툰 적이 있다.




어제 밤, 둘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자야지!” 다그치는 엄마에게 복수라도 하듯
이불 위에 지도를 그려놓았다.

남편은 젖은 옷을 벗기며 장난스레 말했다.


“율, 이건 엄마 생일선물이야?”


율이는 아무 대꾸 없이 엄마 품에 폭 안겨 눈을 감았다.


“율, 자다가 쉬하면 감기 걸려요.”


나는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아침마다 태블릿을 찾는다.
내가 안 주면 속상해서 울기도 한다.
‘할머니, 나 속상해요.’라고 말하고 싶은 듯,
할머니 앞에 가면 오히려 더 울음을 터뜨린다.


휴대폰에 집착하는 것이 걱정되어 알림장에 적었더니
선생님이 “율이는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답장을 보내주셨다.

나는 가끔 율이의 눈빛을 본다.
아직 말은 못 하지만, 눈빛이 너무 또렷하고 깊다.


“율, 엄마 물티슈 좀 줘.”


아이는 ‘물’이라는 단어만 알아듣고
물병을 들고 와서는 ‘아니야’라는 내 말에 속상해한다.

그럴 때면 문득 멀게 느껴진다.


‘언제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감사하다.

태어났을 때, 산소가 뇌에 가지 않아 뇌병변 소견을 받았던 아이.
의사는 걷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겨지지 않음도 있었지만,

신앙때문인지 걸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재활치료를 다녔고,
기적처럼 아이는 걸었다.
지금은 조금 비틀거리지만 잘 뛰어다닌다.


‘한 단계만 더.’


가능성이 보이면 사람은 다음 단계를 꿈꾼다.
나 역시 그렇다.


‘율아, 엄마는 너와 대화하고 싶어.’


네가 원하는 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그 목소리로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해주길.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지만,
그때가 되면 또 다음 단계를 바라보겠지.


육아는 끝없는 성장의 여정 같다.

‘이렇게 해도 될까? 잘하고 있는 걸까?’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발달이 느린 아이의 부모든, 그렇지 않은 부모든
그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율아, 니가 얼마나 멋있어지는지 엄마가 지켜볼게.’
항상 응원할게.
항상 기도할게.
항상 네 편이 되어줄게.


창의적으로 저지레하는 너를 보며 믿는다.


‘너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믿고, 오늘도 이렇게 쓴다.
말은 씨가 되고,
글은 약속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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