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외출 중
하루에도 몇 번씩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날, 둘째는 아무 말 없이 외출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작은 ‘외출’을 통해
다시 한 번 아이를, 그리고 나 자신을 배웠다.
둘째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엄마의 휴대폰이나 오빠의 태블릿을 찾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이보다 먼저 일어나 전자기기를 숨기는 것이 중요한
아침일과가 되었다.
하지만 며칠 전, 내가 아이보다 늦게 눈을 떴다.
숨기지 못한 태블릿을 발견한 둘째는,
아침밥을 먹으러 할머니 방으로 가는 길에
내가 그걸 뺏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예민한 첫째 아들이 말했다.
“엄마, 그러니까 제가 율이 버리자고 했잖아요? 계속 안에서 키울 거예요? 너무 시끄럽잖아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안에서 키울 거냐니.’
아이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엉뚱하고 순수한 표현이었다.
그 속엔 동생의 울음이 버거웠던
오빠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들, 하나님이 너도 율이도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어.
율이가 떼를 써도, 엄마는 버릴 수 없어.
그건 나쁜 말이야.”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로 ‘버리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작은 배움이 자라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틀 전, 교회에서 교육이 있었다.
나는 강의를 듣는 동안 아이들을 교회 내
카페 공간에 앉혀두었다.
첫째는 장난감 로봇을,
둘째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엄마 강의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줘."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첫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 말이 반가워 미소를 지었지만,
동시에 ‘동생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후, 아이가 다시 뛰어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율이가 없어졌어요.”
우리는 함께 교회 안을 뛰어다녔다.
지하 3층 체육관, 2층 교육실, 1층 주차장,
그리고 교회 밖 버스정류장까지.
어디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내방송을 요청하며
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주님, 제발 율이를 지켜주세요.'
그때 첫째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율이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지금은 울지 말고 찾자. 그리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얼마 뒤, 둘째는 교회 옆 마트에서 발견되었다.
타요 장난감 코너 앞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장난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렸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다음날 밤, 둘째는 감기약을 먹던 중
실수로 약을 바닥에 쏟았다.
피곤했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소리쳤다.
“율, 뭐 하는 거야!”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물티슈로 바닥을 닦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일까?’
불과 하루 전,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던 그 간절함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가 율이한테 화낸 건 잘못이야.
약이 쏟아져서 속상했지만,
그렇게 소리 내면 안 됐어. 미안해.”
아이들은 매일 내게 가르침을 준다.
엉뚱한 말 한마디 속에서도,
뜻밖의 사고 속에서도,
사랑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며
하루하루 자라간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는
말씀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여전히 죄의 습성이 남아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 역시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아이들을 통해, 사랑을 통해,
그리고 나 자신을 조금씩 교정해 가는 중이다.
오늘은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더 많이 웃고,
함께 시간을 즐기기로 다짐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매일 예기치 않은
외출을 맞이하는 일 같다.
어떤 날은 마음이,
어떤 날은 믿음이,
그리고 어떤 날은 둘째가 외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