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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을기억해 Jun 03. 2022

모든 것은 몸으로부터.

몸에 대해 내 멋대로 써본 이야기들

최근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꼭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계단을 오르는 일이다. 아침 출근길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 번에 8층씩 두 번을 오른다. 정확한 자세로 계단을 오르면서도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오르는 것이 핵심인데, 웨어러블 기기로 측정해보면 심박수가 160을 훌쩍 넘을 때가 많다. 대략 두 달은 되었을 것이다. 처음 할 때는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다 올라간 후에도 그렇게까지 숨이 가쁘지는 않은 느낌이다. 고작 8층 정도의 높이라 큰 운동 효과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내 몸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체감되는 수준이랄까?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 작은 성과에 기뻐진 나는 좀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점심에도 틈을 내서 30분 정도를 빠른 속도로 걷기로 한 것이다. 이는 1만보를 걷는 것이 건강을 향상시키는데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않을뿐더러, 차라리 빠른 걸음으로 걷는 30분이 건강 및 신체 능력 향상에 좋다는 영국 다큐의 실험 결과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얼마나 빠르게 걸어야 하냐고? 함께 말은 나눌 수 있어도 노래는 부를 없는 수준으로 걸어야 한단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성인 기준 1분당 110~130보 정도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120보 정도로 걸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이 정도로 걸어야 비로소 심박수가 135에서 140을 웃도는 수준이 된다. 점심에 시도하기에는 꽤나 적절한 운동 강도라 할 수 있겠다.


점심마다 걷는 코스는 매번 바뀐다. 코스를 정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교차로의 신호등이다. 그날 신호등이 어디로 켜지는지에 따라 먼저 켜지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그러고는 남은 점심시간이 얼마인지를 확인해서 회사로 돌아가기 적당한 코스를 가늠하곤 하는 것이다. 많이 걷는 날은 40분 정도, 적게 걷는 날은 15분 내외가 보통이다. 점심 끼니를 때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오래 먹은 날은 아무래도 걷는 코스가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날은 조금 무리해서 코스를 길게 이어가되, 달리는 구간을 정한다. 빠른 속도로 쭉 걷다 보면 근육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기보다 정신력으로 다리를 붙들고 간다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지는 순간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신기한 것은 이때쯤 속도를 높여 달려가 보면 빠르게 걷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느낌으로 쭉쭉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다리가 영 말을 안 듣는다 싶지만 제법 달릴 만은 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몸으로 체득한 이후로는 다만 조금이라도 달리는 구간을 만들게 됐다. 훗날, 내가 걷기보다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다면 바로 이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점심 걷기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계단이다. 모두가 발걸음을 옮기는 점심시간의 엘리베이터를 마다하고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일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고 말았다.


비상계단으로 가는 문을 열면 언제 환기했나 싶을 정도로 텁텁한 공기가 온몸에 훅하고 들러붙는다. 동시에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하던 1층의 소음도 저 멀리로 사라진다. 문이 닫히는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서는 느낌이랄까? 메아리치듯 누군가의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도 간혹 있지만, 대개의 경우 계단들 사이에 나 홀로 덩그러니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모든 소리가 삼켜져 버린 것 같은 그 공간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다수의 계단들이 그러하듯이 세 가지의 선택지가 존재할 뿐이다. 오르거나, 내리거나, 다시 돌아서서 나가거나. 그러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곤 했다. 마치 오후 일과를 시작하려면 반드시 그런 의식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혼자만 비 맞은 듯한 얼굴과 한껏 달아오른 몸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는 다시 오후 업무에 매진하는 식이다. 이뿐인가? 라고 생각하며 최근의 일을 회상해보면 인생 처음으로 클라이밍을 시도해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고, 사진을 찍겠다는 각오로 2만보씩 걷는 날이 서너 차례는 될 만큼 많이 움직이며 살았다. 돌이켜보니 이래저래 외부 활동이 많은 달이었구나 싶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을 이어간 지 얼핏 한 달쯤 되었을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정작 새삼스러운 것은 이러한 일련의 동작들을 하나하나 인지해나가는 일이다. 운동을 해나가면서 여기에 팔이 있었구나, 다리가 이렇게 움직였었지? 하는 느낌으로 의식적으로 몸을 인지하는 그런 순간들. 당연하게 움직이던 몸의 부분부분들이 비로소 삶의 한 축으로써 와닿는 순간이다. 시인이 꽃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꽃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 것처럼 나는 의식 속에 내 몸동작 하나하나를 새겨 넣는 느낌으로 그 모든 것을 감각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몸으로 하는 활동을 문득 의식하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로부터 시작된 철학에의 관심이 철학의 역사 전반으로 뻗어나가면서부터다.


몸의 철학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나는 이 표현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메를로 퐁티라는 철학자를 알게 되면서 그가 주창한 '몸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철학사를 통틀어 끊임없이 논쟁되어온 주제 중 하나는 우리의 근본이 몸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아니면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라고 생각하며 이원론을 지지하는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몸과 마음이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지 않지만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것처럼 합이 맞춰지게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한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도 있고, 애초에 심적 상태 및 물리적 상태가 왜 상호 관련되어 있는지 대답할 수 없으며 그저 맹목적인 사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창발론자들도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하는데 그 갈래 중 하나가 바로 메를로 퐁티에 닿아있는 것이다.


사실 메를로 퐁티를 소개할 수 있을 만큼 그나 그의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못하다. 내가 집중한 것은 바로 '몸의 철학'이라는 관점 그 자체였다. 우리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몸으로부터 모든 것이 확장된다고 보는 것이 내게는 무척 새로웠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정신이나 이성, 자아, 욕망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부터 떨어져 몸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된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몸보다는 정신의 우월함을 믿어왔다고 생각한다. 내 근본이 정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영적으로는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니체의 영원회귀 같은 개념을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몸에 대한 생각들과 거기에 대한 글을 읽고, 실제로 몸을 지각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점점 몸이야말로 나의 근본이라는 생각에 가닿았다. 몸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은 공기마냥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몸의 감각이나 동작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생각은 이렇다. 나의 정신이 따로 존재하고, 이를 통해 삶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믿음은 내 삶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삶에 대한 욕심, 후회하는 일들에 대한 미련들이 만들어낸 '개인적인 바람'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근본적으로 나의 인생이 내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됐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유전적으로 생명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IT 기술을 통해 내 존재가 디지털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삶의 종착역은 결국 내 신체일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몸의 수명을 끝으로 생명의 마지막에 다다를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삶을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해 주니까.


최근 든 행복에 대한 생각 역시 비슷하다. 2주 전 받아본 뉴스레터에서 그런 이야기를 봤다. 커피를 마실 땐 커피만 마셔보고, 음악을 들을 땐 눈을 감고 음악만 듣고, 샤워할 때는 샤워만 해보라는 제안을 친구가 해줬는데, 그대로 하고 보니 일상이 조금 더 행복해지더라는 이야기였다. 내게는 복잡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특정한 감각만을 지각해보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쩌면 우리는 몸의 감각 그대로에 순응하거나 몸으로 하는 활동에 최대한 단순하게 접근할 때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몸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시선을 사로잡는 요즘이다.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이 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다른 생각이 지금의 생각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몸에 대해 좀 더 의식적으로 지각하며 살게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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