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글감으로 ‘토끼’라는 주제를 보고 문득 떠오른 것은 동화 속의 주인공인 ‘벨벳 토끼 인형’이었다. 아이가 인형에게 보내는 사랑을 받다 보면 ‘진짜’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진짜 토끼’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그 토끼 인형 말이다. 아동문학가 마저리 윌리엄스의 대표작으로 해외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동화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동화 속에서 벨벳 토끼 인형은 결국 진짜가 되지만 결말은 다소 씁쓸하게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화라면 으레 그럴 법한 결말보다는 현실 세계가 가진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는 느낌이 든달까? 그만큼 벨벳 토끼 인형의 결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애잔함을 느끼게 하고, 마음 한 구석을 저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 속의 대사들이 ‘진짜가 되고 싶다..’라는 내 마음속의 열망을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막연히 생각하던 어른의 기준은 마흔 살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것이 싫었던 나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 나이쯤이 되면 모든 것이 안정되고,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어른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어른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아주 간절했다. 그렇게 마흔 살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진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짜가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이기보다는 모호하고 막연한 목표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몰랐지만 내 삶이 어딘가에는 쓰임새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깊이 숙고한 끝에 내려진 신중한 결정들이길 바랐다. 내가 행동으로 옮겨온 것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까? 무언가에 휩쓸리기보다는 내 판단과 내 결정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런 행동을 두고 용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만용이라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내 멋대로 했던 선택이 항상 좋은 결말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만 집중한 덕분에 많은 것을 경험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리저리 방황하면서도 내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시도했기 때문이다. 건축, 사진, 시각디자인, 프로그래밍에 이어서 글쓰기까지.. 요즘 말로 치면 N잡러보다는 취미부자 쪽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마흔 살이 코 앞까지 바짝 다가온 지금,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 바라던 ‘진짜’의 기준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과거에는 ‘진짜’가 된다는 것이 사회 속에서 내 쓰임새와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즐길 줄 알며, 관심 분야에 대해서 만큼은 조예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가 되는 길이 아닐까?
벨벳 토끼 인형이 ‘진짜 토끼’가 되었던 결말이 초반에 품었던 기대와 조금 달랐던 것처럼 내가 도달하게 될 마흔 살 역시 그동안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그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도달하게 될 마흔 살의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기대하는 ‘진짜’ 나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