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뜻밖의 여정
설마설마했는데 한국 집에서 보낸 택배가 마드리드 세관에 걸렸다는 통지서가 기어코 날아오고야 말았다. 커버 이미지의 찢어진 편지 봉투에서 통지서를 받을 당시의 분노가 느껴진다.
스페인은 한국에서 보내는 택배를 제대로 받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오죽하면 절대 택배 받아보지 말라는 글도 인터넷에 보인다. KOTRA에 따르면 "최근 재정적자로 세수가 줄면서 스페인 세관의 통관심사가 매우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세관 입장에서는 일단 잡고 보면 이득인 것이, 관세를 낼 물건이 아니어도 택배 보관료―누가 보관해달랬냐!!!―와 수수료로 5.34유로를 무조건 떼어간다. 게다가 내용물에 따라 관세까지 추가로 부과할 수도 있으니 세관으로서는 쏠쏠한 수입원인 셈이다.
그동안 위의 까다로운 조건을 다 맞추고 혹시 몰라 입학허가서까지 붙여서 보내 2번을 무사히 받았다. 하지만 다른 조건은 예전처럼 다 맞추었고 필수 요건도 아닌 입학허가서만 안 붙였을 뿐인데 이번에는 세관에 걸리고 말았다. 복불복이라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사진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송장 번호만 있으면 한국 우체국과 스페인 우체국 홈페이지 모두에서 배송 조회가 가능하다. 올 때가 되었는데 택배가 오지 않고 위와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통지서에는 택배를 찾을 수 있는 방법 세 가지가 나와있는데, ① 필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거나 ② 온라인으로 처리하거나 ③ 나처럼 마드리드에 있는 세관을 직접 방문해서 수령할 수 있다. 우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였으면 당연히 온라인이 훨씬 편리하고 빠르겠지만 여기는 스페인이다. 온라인으로 해본 분의 블로그를 보니 역시 직접 가는 게 '그나마' 속 편한 방법이고 온라인은 자칫하다간 내지 않아도 될 관세를 내야 할 수도 있다.
세관에 걸리고 약 2주 안에 찾아가지 않으면 택배는 반송된다. 문제는 통지서를 금요일 밤에 받았는데 그 다음 주 수요일이 통지서에 적힌 기한이라는 것이었다. 화요일은 하필 공휴일이었고 수요일은 수업이 3개라 어쩔 수 없이 월요일에 수업 2개를 빼고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생각보다 정말 땅이 넓어서, 말라가에서 마드리드는 무려 500km가 넘는다. 급하게 교통편을 구하려니 비행기와 기차는 너무 비쌌고 특히 렌페는 무려 왕복 20만 원(!)이었다. 그 돈이면 비행기를 타고 말지... 카풀인 블라블라카도 알아봤지만 시간이 애매해 결국 최후의 보루 버스를 타게 되었다.
세관이 정말 스페인스럽게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밖에 일을 안 하는 데다가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스페인이라 일요일 밤에 야간 버스를 타고 가서 월요일 새벽에 마드리드에 도착하기로 했다.
준비물
통지서(작성하지 말고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여권
수수료(5.34유로)
전광판에는 직행이라고 써있지만 거짓말이다. 처음 들어보는 작은 마을들을 꽤 들르고 나서야 속도를 내며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와이파이가 안 터진다는 매우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승차감이 생각보다 괜찮았고 옆자리가 비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7시간여를 달려 새벽 5시 반이 조금 넘어서 마드리드 Sur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2시간 정도를 보내야 했는데 콘센트를 찾아 헤매다 자판기 옆에 있는 녀석을 겨우 발견했다. 승차장이 있는 층에서는 유일한 콘센트인 것 같다.
마드리드는 브뤼셀 갈 때 경유하느라 공항만 잠깐 들러본 게 전부였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여행으로 올 계획이 이미 있었기에 이번 방문은 정말 뜻밖이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 해서 여행 때 쓸 지하철+버스 10회권을 미리 사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지하철 표시를 따라가면 역이 나오고 발권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지하철'은 렌페에서 운영하는 Cercanías가 아니라 Metro라는 것!
택배를 찾으려면 바로 세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관 근처의 우체국(위치: https://goo.gl/maps/aGZEGS84s1r)에 먼저 들러야 한다. 가는 방법은 늘 그렇듯 전지전능하신 구글 맵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다. 터미널과 연결된 Méndez Álvaro 역에서 출발해 Avenida de América 역으로 간 뒤 버스로 환승하는 경로이다. 마드리드 지하철 6호선은 우리나라 2호선과 같은 순환선이라 방향을 잘 확인한 후 타야 한다.
지하철에서 전화와 데이터는 잘 안 되면서(보다폰 기준) 열차 안에 USB 꽂는 곳이 있어 충전이 가능하다는 점은 문화충격이었다. 물론 모든 열차에 있는 것은 아닌 듯하지만 고속버스도 그렇고 교통수단 내부에 콘센트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 도입이 시급하다.
10회권 이용 시 또 하나 주의할 점은 EMT에서 운행하는 버스만 탈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 맵에서 시키는 대로 탄 버스는 알사 버스여서 2유로를 내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우체국까지 걸어가며 보니 마드리드는 가로수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말라가와 달리 가을 느낌이 물씬 났다. 단풍과 낙엽이 가득한 주택가를 지나니 드디어 우체국 간판이 보인다. 주변에 다른 우체국 간판이 많아 헷갈리니 구글 맵을 보며 찾아가는 것이 좋다.
세관과 달리 이곳의 업무 시간은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라 여는 시간에 맞춰 왔는데 벌써 내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5명 정도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Aduana Servicio de postales라고 써있는 곳으로 가서 직원에게 통지서를 제출하고 잠시 기다리면 통지서와 함께 송장을 준다.
이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세관(위치: https://goo.gl/maps/S1bG3HXdmyP2)으로 가야 한다. 건물 1층 오른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소지품 검사를 한 뒤 우편 관련 창구로 가 택배를 찾으러 왔다고 이야기하면 양식을 준다. 내용물은 한국에서 쓰던 옷과 신발이라고 적고 액수는 15유로로 적었더니 무사히 통지서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몰라 입학허가서도 챙겼었는데 걱정과 달리 별일 없이 너무 순조로워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제 다시 우체국으로 가 이번에는 아까의 창구가 아닌 다른 창구의 직원에게 도장 받은 통지서와 함께 수수료를 내면 택배를 가져다준다. 큰 어려움 없이 한 시간 만에 금방 받아서 좋기는 한데...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줄 거면 대체 왜 잡냐고!!! 세금 충당이 목적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원래 이번 주말에 말라가에서 보기로 한 친구가 마침 마드리드를 여행 중이어서 만나고 돌아가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인데, 말라가의 아쉬운 점은 가을 분위기가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마드리드는 한국의 가을과 정말 비슷한 풍경이라 반갑다.
솔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한 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타길래 우리나라처럼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팔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레에 들은 것은 스피커였고 반주에 맞춰 바이올린 연주를 한 뒤 돈을 받으러 다녔다.
그란 비아에서 친구를 만나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가서 줄이 길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금방 표를 살 수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경우 인터넷 예약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현장에서는 25세 이하 학생의 무료 입장이 가능한 데 반해 인터넷으로 예약할 경우 학생 무료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지만 최소 1장은 무조건 유료 입장권으로 구매해야 한다.
워낙 유명한 미술관이지만 미술에 그렇게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너무 넓어서 유명한 작품들만 몇 개 보고 나왔다. 들어갈 때 짐을 맡겼는데 미술관 출입구가 여러 개라 들어왔던 그 출입구를 찾느라 나올 때 한참을 헤맸다.
택배 찾는 것 외에는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크리스마스 연휴 때 다시 오게 될 마드리드라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비는 안 왔지만 다음에 올 때는 부디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겠다.
블로그에서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었다. 블로그에서 추천한 대로 고기와 샐러드, 감자튀김에 치킨 2조각까지 해서 2인분에 23유로(식전빵 무료, 음료는 별도)인 세트 메뉴를 시켰는데 맛도 괜찮았고 양이 정말 많아 남자 둘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버스 시간도 꽤 남았고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Sur 터미널로 돌아왔다. 중간에 마트에 들러 버스에서 먹을 빵과 물을 샀는데 버스에 타고 확인해보니 물이 아니라 사이다여서 당황스러웠다. 탄산수도 아니면서 왜 물이랑 똑같은 페트병에 파는 것인가... 그리고 이번에도 와이파이는 끝내 터지지 않았다.
전날 걸린 시간보다 짧은 6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24시간 동안 1000km 넘게 이동하고 버스에서 13시간을 보낸 셈이다. 애국심 가득한 세관 덕분에 교통비와 식비와 수수료로 스페인 경제의 활성화에 적극 기여한 뿌듯하고 긴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