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다 글이 먼저다.

by 보나쓰

책을 찢어 글을 오려 붙일 생각이었나 보다. 안 써지는 글을 붙들고 며칠을 버티다 보니 정신이 들었다.


하루종일 하얀 여백에 눈을 두고 앉아 있으면 눈물샘 말라 피로해진 눈에 핏줄이 서고 뻑뻑한 눈꺼풀에 무게가 실려 가끔씩 눈을 감게 된다. 눈을 뜨면 까만 키보드 위에 여전히 두 손이 엎어져 있다. 열손가락은 가끔씩 툭툭 거리며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책을 쓰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에 뭉친 얘기들을 풀어내고 싶었고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정에 공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글 한 줄을 쓸 때마다 에세이를 완성할 때마다 기분 좋은 환대를 받는 느낌이었다. 즐거운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란 얼마나 뭉클한 것인지. 내일을 얼마나 기대하게 하는지. 브런치가 선물처럼 내게 왔다.


처음에는 나만의 힐링에 가까웠던 글들이 살아서 숨 쉬듯 구독자와 라이킷을 먹고 자랐다. 슈퍼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 힘으로 두 권의 브런치북을 완성했다. 완성된 브런치북을 구독해 주신 분은 내게 좀 더 다른 의미가 있다. 나의 글을 지지하며 꾸준히 지켜봐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브런치에서 다른 작가의 글을 완독하고 독자가 되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관용과 비판으로 완성되는 나의 독자가 첫 줄에서 접고 나가버리지 않았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힘이 된다. 글은 서서히 존재의 이유를 찾고 제 삶의 구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책을 써야 해...


나는 글을 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고 급기야 '책'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인쇄냄새가 나는 종이책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브런치북 두 권의 신출내기가 야무진 꿈을 품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동경은 결국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하고 실망스러운 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영혼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첫 글에 비하면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나를 채우지 못하고 빈집털이하듯 털어내고만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글에서 멀어진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아웅다웅 살아온 세월 동안 책에서 손을 놓았던 기간도 길었다. 쥐어짠다고 좋은 글이, 책 한 권이 뚝딱 만들어질 리가 없는 일이다.


결국 나는 '책에 대한 동경'에 책갈피를 끼우고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렇게 반짝이는 꿈으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글을 쓰는 힘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나다라마바사


어린 시절 가나다라마바사 글자를 뗄 때 자음 모음을 열심히 베껴 쓰면서 격자무늬 노트를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쓰며 조막만 한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내며 읽었었다. 그러다가 아빠, 엄마, 가족들의 이름을 써가며 단어를 익혀갔다. 다음에는 소리를 내어 책을 읽고 뜻을 배워갔다.


책을 출간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겪어야 할 과정이 있다. 첫 글자에 책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 줄의 완성된 글보다 책에 대한 욕심을 먼저 품었었다. 글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로기 상태에 빠졌던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은 그저 무엇으로 책을 지을 생각이었는지 실소를 한다.


지나온 글을 읽어 보았다. 맥을 끊어 버리는 한 줄의 문장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수맥이 끊긴 숲은 나무가 무성할 수 없다. 한 문장 한 문장은 물길을 내는 작업이다. 우직하게 길을 닦아 가야 한다. 키보드 위의 두 손이 열정을 잃지 않도록, 살아서 파닥거리는 생명력 있는 글에 진심을 다하자. 책 보다 글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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