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나쓰 Jun 08. 2024

바람


살랑살랑 봄바람이 오래 머물러 태양이 닿는 자리마다 시원하게 씻긴다. 이게 웬일인가 싶게 봄이 떠날 맘을 먹지 않는다. 어제도 나시를 입은 등에 내리쬐던 29도의 태양광선이 찌릿하게 따가운 여름의 맛을 냈지만 이내 봄바람이 불어 위로를 하니 여름은 올 수가 없다. 계절이 술래잡기를 한다.


햇빛을 밀어내는 바람이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있는 작은 나무를 뒤흔든다. 여신의 입김이 머물렀을 것 같은, 가볍고 부드럽게 스윙하는 바람이다. 나는 그 바람에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에어컨을 트는 카페에 앉아 상실감을 느낀다. 뜰로 이어지는 뒷문 앞에 놓여있는 둥근 테이블이 이 카페에서의 내 최적의 자리이다. 더위가 몰려오면서 문은 늘 활짝 열려 있었다. 요사이 내내 바람이 좋으니 닫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사계절 내내 바람이 불지만 유독 이맘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한다. 겨울바람은 시리고 가을바람은 선선하다. 여름바람은 습하고 진득하다. 이맘때 부는 바람은 태양이 뜨거운 시간에도 적당히 시원해서 걷기에도 좋고 드라이브하기에도 좋다.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닫혀버린 문의 단단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생각한다. 카페 안에 퍼지는 가짜바람이 냉기를 만들기 시작할 때쯤 누군가가 드나든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틈이 벌어졌다. 틈은 점점 더 벌어져 문 한쪽이 완전히 열려버렸다.


그때서야 잃어버렸던 바람이 다시 불어 들어온다. 바람을 따라 일어나는 나의 의식이 눈을 감고 깨어난다. 모닝커피를 하면서 열었던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바람이 안으로 밀려들며 날리던 흰색 리넨커튼의 우아한 몸놀림이 떠오르며 커튼 위에 숨어있던 나의 어둠을 들춰본다.


여전히 어둡지만 이제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바다 끝 밑바닥 먼 이야기처럼 지워져 가는 까만 밤의 기억이다. 산을 넘고 나무와 꽃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내 몸으로 스며들고 내 의식의 바람은 어둠을 더더 밀어낸다. 시곗바늘이 왼쪽으로 돌아가듯 자연스럽다. 


어둡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빛의 기억. 

바람아 불어라. 내 의식을 점점 더 깨워 나를 깨워 서서히 계단을 오르듯 밝은 빛만 찾아 향할 수 있도록.

남향으로 불면 나는 남쪽으로 기울 테고 언젠가 북쪽에서 불어오면 북풍을 견디며 서있을 테다. 너는 너그러워서 지금 내게 신의 은총 같은 바람이 되어 불어온다. 나는 감사하며 너를 맞는다. 오늘도 네 덕분에 뜨겁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는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