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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Jun 11. 2024

비와 상상

요즘 비는 갑작스럽게 왔다가 갑작스럽게 떠난다. 굵은 비가 솨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아침에 베란다에 앉아 생각한다. 어제까지 쏟아지던 태양과 태양을 흐트러 놓던 바람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제의 대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흠뻑 젖은 오늘은 뜨겁던 날에는 맡아지지 않던 냄새로 가득하다. 바닥에 바싹 들러붙어 있던 작은 박테리아가 만들어 내는 지오스민이 진하게 풍겨 흙냄새가 빗살을 타고 오른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냄새가 뒤섞여 이름 지을 수 없는 상쾌함이 내 주변을 가득 메운다. 


익숙한 것들이 익숙해지지 않는 날이다. 빗물에 일그러지는 형상들, 얼룩지는 추억, 이름들 그리고 이름들. 비가 실어 나르는 하나 쓸데없는 감정의 소비가 아깝다고 생각하다가도 내 상상의 나래는 나를 너머 흐릿한 망상 같은 상상에 빠져 든다. 


그리운 바다를 떠올리며 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추락을 보고 있다. 수많은 빗방울은 바다 위로 떨어져 무의 형태가 되듯 사라지고 짠내 나는 바다는 즐거이 그들을 맞는다. 남녀의 몸이 뒤섞여 사랑이 되듯이 바다와 비는 하나의 형태를 이루며 우아하게 일렁댄다. 몸짓은 시가 되고 감동이 되어 나의 가슴을 채운다. 


비는 내가 되고 나는 바다가 된다. 아찔하게 떨어지는 절벽에 부딪쳐도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 나는 유형의 무형이며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상상 속의 인어공주일 수도 있으며 인어공주가 바다에 던져버린 칼일 수도 있다. 나는 등껍질이 깨진 바다달팽이일 수도 있으며 고래가 내뿜는 숨일 수도 있다.


한껏 쏟아지는 비에 나도 쏟아진다. 나는 빗속에서 하는 상상이 좋다. 비가 퍼붓는 이 시간에는 태양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다시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타오르며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은 떠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죽어버린 영혼조차 그 자리에서 영혼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는 그 모든 삶과 상상과 그림자를 실어 나른다. 존재하는 이유가 이동시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생을 흐르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비에 젖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 가슴이며 나의 비효율적인, 있었던 적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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