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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Jun 22. 2024

은총

섭씨 35도. 어제까지 도시를 뜨겁게 달구던 온도이다. 6월이 이렇게 더우면 7,8월은 어떻게 버티냐며 한탄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일상적으로 들려왔다. 작렬하는 태양의 온도는 사실 30도만 넘어가면 그저 뜨겁다는 표현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덥다는 애교스러운 표현은 화가 잔뜩 오른 태양광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말라가는 풀뿌리처럼 시들 거리던 사람들은 시원한 에어컨 앞으로 몰려들었고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이 걸린 사람들은 연신 기침을 해대며 콧물을 닦아냈다. 선순환이 없는 잔혹한 계절이 시작되고 있는 건가. 공원의 그늘로 숨어들어 장기를 두고 있는 정갈한 노인의 모시옷이 에어컨의 냉기보다 시원하게 느껴졌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차가운 음료를 연신 들이키며 화끈거리는 열기를 쫓으려 애를 썼다. 냉장고에 떨어질 틈 없이 채워 넣는 얼음이 이르게 찾아온 한여름을 실감 나게 했다. 쓰러져 누워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찌들어 가는 몸이 맥을 못 출 무렵이 되자 하늘이 뚫렸다.


쏴 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조선의 기우제라도 누군가가 지냈다면 엎드려 절을 수백 번 할 일이다. 씻겨 나간다. 빗소리에 모든 봄날의 기억이 씻김을 한다. 타오르던 도시의 열기가 꺾여 나간다. 모두가 씻긴다. 은총이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것도 신이 내려주는 은혜도 아니다. 지금의 이 순간이 은총이다. 


사자의 이빨처럼 드러났던 열기는 빗줄기가 때릴 때마다 땅밑으로 꺼져간다. 속 시원한 이 광경이 오늘 내게 희열을 준다. 일부러 차를 저 멀리 세우고 비를 맞고 걸어 들어왔다.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며 얼굴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고 드러난 팔을 타고 미끄러지는 빗줄기가 나를 완전히 적셔 비가 되게 하기를.


비가 되어 흐르면 들꽃과 풀과 나무와 강과 바다를 기웃거리며 우주의 한 구석에 나 역시 존재함을 감사히 여기며 별이 되는 꿈을 꾸고 싶다. 뜨거움에 죽어가던 뇌세포를 있는 힘껏 깨워가며 그 꿈을 완성해 가는 또 그런 꿈을 꾸고 싶다. 


갈증은 반드시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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