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나쓰 Jul 09. 2024

술주정

4.5도의 캔맥주를 하나 들이킨다. 한 모금을 들이켤 때마다 취해가는 느낌이 알싸하게 목을 타고 내려간다. 맥주는 살아있고 느낌은 살아있지 않다. 느낌이란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느낌은 맥주보다 심장에 가깝다. 한 모금씩 몇 분도 되지 않아 한 캔을 다 들이키고 심장이 저릿저릿해 온다.


술의 기운을 빌어 나의 비애를 실어 나른다. 무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한 캔을 비울 때마다 심장에 가득 채워지는 일렁임에 어찔해진다. 출렁대는 연갈색의 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얼굴에 마취를 한 것 같은 얼얼함을 만든다. 눈이 반쯤 감기고 몸의 감각은 둔해진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높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술주정뱅이처럼 발을 높이 들어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우스운 걸음을 걷는다. 피식피식 웃으며 내가 나를 비웃는다. 아니, 재미있는 광대의 춤을 구경하는지도 모른다.


취기가 느껴질수록 심장의 느낌은 살아난다. 터져 나올 듯이 벌렁대다가 침묵하는 난파선처럼 가라앉다가 나를 어디론가 자꾸만 실어 나른다. 다다르지 못할 곳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의 마음은 정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술만이 그곳을 알고 있다. 나는 술을 찬양하지 않지만 존재해야 함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술이 없이도 석양이 지는 무렵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의 정취를 떠올리고 노을이 눕는 보리밭의 낭만을 그릴 수 있지만 그것은 짐작일 뿐 생생하지 않다.


생생함은 나의 가슴에서 나온다. 어느 날의 기억에 내 느낌이 더해지면 현실은 더 현실이 되고 낭만은 비애조차 눈물 나도록 아름답게 만드는 마녀의 묘약처럼 퍼져 영혼을 적신다. 세 번째 캔을 따면서 멈칫하며 글라스를 들여다본다. 비어있는 잔 속에 담가져 있는 내 심장의 펄스가 잔속 공기에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맥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가득 붓는다. 4.5도에 파동이 더 선명해진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살포시 올려본다. 지그시 누르며 흐리멍덩한 눈으로 잔을 들여다본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가 스피커 밖으로 울먹인다. 마지막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살아있어 느끼는 잔인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잔은 비워지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극장 문 뒤에 숨어 도사린 것이 만약 삶이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